나의 삶, 나의 행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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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철 교수(서울대 행복연구센터), EBS 인문학 특강 中

행복은 즐거움인가? 의미인가?

행복이 우연인가 아니면 노력인가 한다면 두가지 요소가 다 섞여있다고 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너무 ‘노력’만 강조하다 보니 조금 행복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행복에 대한 정의를 좀 깊이 들여다 보겠습니다. 물체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저 바깥에 있기 때문에 정의하기도 쉽고 측정하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개념, 주관적인 것, 사랑, 우정, 행복, 이런 것들은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행복에 대한 생각이 저마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다양하지만 이것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본다면 크게 두가지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견해는 행복의 중요한 본질이 즐거움, 쾌락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이론이 프로이트의 이론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멀리하는 ‘쾌락원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이런 행복을 ‘쾌락적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20161007-happiness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그룹에서는 행복을 정의할 때 쾌락에 전권을 주지 않습니다. 쾌락 자체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쾌락의 추구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거나 자기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최대한 발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여전히 철학과 심리학에서 중요한 논쟁거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정리해야 좋은가, 즉. ‘즐거움’인가 ‘의미’인가를 한번쯤 고민해 봐야 되는데 심리학자로서 심리학계에서 얘기되고 있는 것들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즐거움’과 ‘의미’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논의되고 있는데, 즐거움을 추구하면 의미를 포기하는 것 같고 의미를 추구하다 보면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이 어떤 사건에서 즐거움을 얼마나 경험하고 의미를 얼마나 경험하는지를 측정해 보면 실제 현실세계에서는 즐거움과 의미가 같이 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즐거움이 많을 때 의미를 많이 느끼고 즐거움이 약할 때 의미도 약하게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보통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는 즐거움과 의미가 같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번째는, 같은 같은 사람 안에서도 즐거움과 의미는 아주 역동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누구나 젊을 때는 즐거움을 추구하다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의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상황에 직면하면(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 같은) 즐거움 보다는 의미를 더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즐거움과 의미는 양자택일 해서 끝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이와 함께 변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는 것을 알면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즐거움과 의미의 관계에 대해서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가 있습니다. 갤럽에서 주기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행복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 조사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당신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평균이 나오는데, 그 평균을 그 나라가 잘사는 정도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국가가 부유할 수록 삶에 대한 만족감은 늘어나지만 삶의 의미를 느끼는 정도가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더 연구를 해 봐야겠지만 이것은, 즐거움을 많이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아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니까 즐거움과 의미는 양자택일이 아니고, 즐거움을 찾기 힘든 상황에서는 ‘의미’로 그것을 보충해서 삶의 동기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성인들이 시간대별로 요일별로 행복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조사한 연구가 있는데요, 가장 즐거움이 약한 요일은 월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입니다. 왜냐하면 월요일에는 의미 경험을 제일 강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월요일 출근이 즐겁지는 않지만 일하는 것에 의미를 찾음으로써 동기부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든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든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를 비방할 필요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움과 의미 중에 하나를 골라야 된다면 뭐를 택해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미국 국립 과학원에서 재미있는 연구가 소개되었습니다.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이 얼마나 즐거움과 의미를 경험하는지 측정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혈액을 채취해서 유전자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정도가 강할수록 바이러스나 병균이 들어왔을 때 면역이 약화되는 쪽으로 유전자가 활동하고, 의미를 많이 경험하고 있을수록 병원균이 들어왔을 때 병을 억제하는 쪽으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입니다. 사실 일상에 있어서 재미냐 의미냐를 일부러 고를 상황은 별로 없지만 굳이 골라야 한다면 이 연구는 적어도 ‘즐거움이 없는 의미’가 ‘의미없는 즐거움’보다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편 다수(3/4)가 즐거움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고 그보다 적은 수(1/4)가 의미론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행복과 유전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는 주제가 바로, 행복은 과연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행복해질 수 있기나 한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낙관론자가 있고 비관론자가 있습니다. 낙관론자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철학자인데 저서의 제목도 ‘행복의 정복’입니다. 지금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적절한 방법을 택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비관론자는 프로이트입니다. 그는 쾌락이 인간행동의 핵심이라고 봤는데 쾌감은 오래 지속되면 점점 줄게 되어 결국 가벼운 만족감을 낳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낙관론과 비관론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지점은 “행복에 있어 ‘유전’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부분에서입니다. 한마디로 ‘타고나는 것이냐, 길러지는 것이냐’의 논쟁입니다.

리켄(Lykken)이라는 학자는 논문(1996)에서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키가 커지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부질없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학자는 몇년 뒤에 자신의 발언을 취소합니다. 나아가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합니다. 비관론자들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용어는 ‘쾌락의 쳇바퀴’라는 것입니다. 쾌락은 사그라지는 일시적 감정에 불과해서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실내 온도를 셋팅해 놓은 것처럼 각자는 자신의 유전자에 의해서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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