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속의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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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용태 신부의 강의 중> 신호등 2015.07.31호

소유와 행위에 집착하며 사는 동안 우리의 스트레스는 쌓여가기만 합니다. 더 많이 가져야하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스트레스가 고스한히 자식들에게 보여집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어디서 알바하거나 스펙 하나 더 쌓고 자격증 하나 더 가지려고 학원에 다니기 바쁩니다. 부모는 “나는 못배워도 너는 그렇게 하면 안돼. 잘살아야 돼.” 이것은 남보다 더 앞서가고 너 높아지라는 뜻입니다. 자식에게 부모의 삶의 방식을 대물림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어린이 여러분, 한 주 동안 잘 지냈어요?”라고 인사하는데, 이구동성으로 “예” 하고 대답하는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예”하는 녀석들이 몇명 있고 많은 아이들이 “아니요”하고 답합니다. 유치부나 1학년 정도 되는 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천진난만하게 “예” 하기도 하지만, 3학년 쯤 되면 고개를 돌리며 심각하게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얼굴 보면 수심이 가득합니다. 6학년쯤 되면 아예 귀찮아서 ‘아니요’라는 말도 하지 않고 얼굴만 숙이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일까요?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이구동성으로 엄마라고 합니다. 다행인 것이, 그래도 엄마를 제일 사랑한답니다. ‘애증’관계입니다. 한 주일 조차 제대로 잘 지내지 못하는 삶을 사는 피곤한 아이들 투성이입니다. 안스럽기 짝이 없지만 막상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런 세상에서 버티게 하려면 아이들을 그냥 놔둘 수가 없습니다. 채근하고 또 채근하면서 이 세상에 발맞추어 나가라고, 아니 더 빨라지라고 그리고 높아지라고 합니다.

몇년 전에 어느 여고생이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부도 잘했던 여학생이 그냥 뭐 연습장 같은 것을 하나 쭉 찢어서 유서라고 딱 한 줄을 써놓았습니다.

‘엄마, 이제 됐어?’

엄마는 이 아이가 잘 살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더 강해지라고 채근한 것이고 새벽부터 깨워 학원보내고 또 다른 학원도 보내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러한 세상은 이런 와중에 점점 양극화 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새벽부터 일어나 별의별 노력을 다해도 결국은 나보다 더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습입니다. 그런데, 내가 남들보다 앞서고 있고 남들보다 힘이 세다고 합시다. 그런만큼 삶이 풍요롭고 행복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없으면 없어서 문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있어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또하나의 특징이 바로 ‘풍요속의 빈곤’입니다. 많이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남보다 더 앞서가면 그만큼 더 잘 살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핍도 문제지만 많아도 문제입니다. 영양실조도 문제이지만 비만도 문제입니다. 뭔가 많아보이지만 사실은 궁색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옛날보다는 많고 좋아졌습니다. 전쟁 후에 없이 힘들게 살던 때에 비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졌습니다. 옷이 늘어지게 쫙 걸려있는 옷장을 뒤적이면서 ‘입을 게 없어’하고 투덜거리고, 음식점이 즐비한 거리에서 식당 고르다가 시간 다 가버리고, 볼거리도 너무 많아져 길을 잃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볼거리가 너무 없습니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은 주먹만하게 보입니다. 서울에서는 별이 잘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공기가 오염된 것도 있지만 주된 원인은 땅에 있는 불빛이 너무 밝기 때문입니다. 시골에는 가로등도 시간되면 꺼져버려 길이 너무 깜깜합니다. 그래서 별은 주먹만하게 보이면서 빛납니다. TV 채널도 예전에는 몇개 없었습니다. 그래서 왠만하면 ‘여로’ 같은 국민드라마였습니다. 요즘은 채널이 700개가 넘습니다. 습관적으로 리모콘을 잡고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에이, 볼 것도 없네.’하면서 리모콘을 던져버립니다. 너무 많아서 하나를 제대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소리도 그렇습니다. 시골에서는 개 한마리가 짖어도 온동네에서 다 들립니다. 동네 사람들은 ‘어, 누가 왔나봐’ 합니다. 개 한마리가 짖으면 온동네 다른 개들도 다 짖습니다. 풀벌레 소리도 시끄러울 정도로 잘 들립니다. 먹을 것은 또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너무 많이 입에 넣다보니 막상 제대로 맛을 보지 못합니다. 상은 임금님 수라상 처럼 차려놓습니다. 그러나 막상 먹을 때는 밥을 입에 넣고 동시에 국을 떠 넣고 반찬도 같이 집어 넣고 댓 번 씹고나서 꿀꺽 삼켜버립니다. 이렇게 먹는 것을 ‘처먹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처먹는 것은 종들의 습관입니다. 종들은 오분대기조이기 때문에 편안하게 앉아서 잡수실 수가 없습니다. 마님이 부르면 즉시 달려가야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는 양반다리도 못하고 어디 마루에 걸터 앉아서 입에 빨리 넣어서 대충 씹다가 마님이 부르면 씹으면서 달려가야 합니다. 많이 먹는다고 해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20일짜리 효소 단식을 하면 13일째에 오이 한 쪽을 먹게 해줍니다. 오이 안에서 이런 맛이 있었을까하며 그 수많은 맛에 감격합니다. 만약 단식을 하지 않았으면 이 맛을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오히려 많아서 문제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람은 또 다른 가난한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천원짜리 한 장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기 때문입니다.

비우지 못하고 계속 이렇게 채우다 보니 도통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뭔가 개운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체내에 독소만 쌓이고 찌뿌둥하기만 합니다. 비우지 않으면 채워지지도, 풍요롭지도, 충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시대를 진단하고 비우는 것이 해결방법이라 하지만 선듯 비우지 못합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나는 비운다 치자.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채우지 않는다면?’ 하는 것이 그 정체입니다.

나는 비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빈 공간을 누군가가 채워주지 않는다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나만 바보가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겠고 이 세상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배우자도 믿기 힘들고 심지어 부모 자식간에도 믿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돈 빌려줬다가 떼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비우기가 두렵습니다. 확실한 담보가 없이는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채워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비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천당과 지옥에 대한 우화입니다. 천당과 지옥의 모습이 어떤지 너무도 궁금해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환시 중에 그를 어디론가 데리고 갑니다. 천당이었는데 예상하던 대로 사람들이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상다리가 뿌러지도록 차려진 진수성찬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숟가락 젓가락이 사람의 팔보다 훨씬 깁니다. 그런데도 서로서로가 맛있게 잘 먹고 있습니다. 짐작하시다시피, 서로가 서로에게 먹고싶다고 하는 것을 집어 입에 넣어줍니다. 그 다음으로 지옥으로 내려가보았습니다. 먹을 것도 없이 사람들이 쫄쫄 굶고 있으리라 예상했었습니다. 놀랍게도 천당과 똑같이 진수성찬이 그대로 차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쫄쫄 굶고 있습니다. 상황과 조건은 천당과 같습니다. 숟가락 젓가락이 사람 키만큼 길었습니다. 그러나, 남을 믿지 못하고 자기만 먹으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남에게 집어 주고 나서 자기는 남에게서 받아먹지 못하고 바보될까봐 두려워서 그러고들 있는 것입니다. 한두 번 넣어주기를 시도했다가 상처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렇듯 지옥에 더 가깝기가 쉽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진수성찬인데 그것이 이리저리 흐르지 않기 때문에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이 굶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어디에선가 천당의 모습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에서 넘쳐나는 소식은 아마도 지옥의 모습에 더 가까운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두려움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하더라도,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서 등을 돌린다 하더라도 ‘이분’ 만큼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당신 눈동자처럼 나를 지켜주신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아마도 나를 비워주기가 좀 쉬워질지도 모릅니다. 비움은 인품, 그릇, 소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우리 모두가 너무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편주: 여기서부터는 신앙문제로 주제가 옮겨져 가므로 일단 멈추겠습니다. 나를 배신하지 않는, 주춧돌같은 그 성실한 돌덩이는 각자 찾으시기 바랍니다. 종교에 귀의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은 다 그런거야’라고 말할 때의 그 ‘세상’은 나도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답답하여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은 사람을 위하여 ‘칼 라너’라는 현대 신학자의 다음과 같은 글을 참고로 소개합니다. ‘세상’을 거슬러 사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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