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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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용태 신부의 강의 중> 신호등 2015.07.17호

어떻게 하면 잘사는가를 이야기할 때 세상사람들은 ‘가급적 많이 채워라’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드물게 어떤 이들은 ‘비워라. 그러면 충만해진다.’라고 말합니다. 목숨을 내 놓음으로써 목숨을 얻게 되는 것이고 꼴찌가 됨으로써 첫째가 되는 것이고 가난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얻게 되는 것이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왜 비워야 하는가. 삶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흐름 속에서 내가 비우지 않으면 고여 썩고 비워야만 다시 위에서 맑게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흐름은 비움과 채움의 연속입니다. 시냇가에 모든 생명이 약동하듯이 여기에 모든 생명이 약동합니다. 삼라만상은 흐름으로 되어었고 흐름에는 비움이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그래서 공동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의 비움은 누군가의 채움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흐름이니까요. 그래서 우리의 삶도 더불어 함께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나의 것을 비우지 못합니다.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말은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힘차게!’라는 말입니다. 올림픽 구호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올림픽을 넘어선 전쟁터입니다.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가급적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정보화 시대에서 최대한 정보를 먼저 얻어 이득을 취하기 위해 하나라도 더 끌어모으기 위해 애씁니다. 이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철저하게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할 것없이 심지어는 종교까지도 여기에 발맞추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남보다 빠르고, 높고, 힘있는 것이 절대적인 미덕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창세기 아담과 이브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궁핍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인간의 최초의 모습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 머물 수 밖에 없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다 선악과를 침범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사건을 통해 그들은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소유가 시작됩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 모든 것을 누렸으나, 주인이되어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잃습니다. 인간의 원죄는 어찌보면 소유입니다. 죄를 짓고 난 다음 제일 처음 한 행동은 옷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옷에는 주머니가 달려있습니다. 벌거숭이일 때는 넣을 곳이 없었습니다. 이놈의 주머니는 인간 역사 안에서 커지기만 하고 한번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보다 높게, 보다 빠르게, 보다 힘차게’라는 구호로 이어져오는 죄의 역사입니다.

이러면서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소에 잡히는 것을 취하려고 온힘을 다하는데, 우리의 삶을 참으로 풍요롭게 하는 것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 무형의 소중한 가치들을 나 스스로 폐기처분해 버립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은 느리다는 것은 ‘빠르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느리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입니다. 느려야할 때는 느려야 하는 것입니다. 길가에 핀 꽃 한송이를 시속 300km로 달리는 고속철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습니다. 꽃을 보려면 걸어가다가 멈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느리다는 것을 빠르지 못한 것, 뒤쳐진 것으로 생각하며 느림의 가치를 버립니다.

둘째로, 낮은 것은 ‘높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서 낮음을 보잘것 없음과 같은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낮아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123층 빌딩을 짓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1층 없는 123층이 있습니까? 만리장성이 웅장하다고는 하나 벽돌 한장 없는 만리장성이 있습니까? 어른 많은 길거리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아이를 보고 내가 낮아져 그 눈높이에 맞추지 않으면 그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높지 못해서 낮은 것이 아닙니다. 낮음은 그 고유의 가치가 있습니다.

세째로, 약함도 ‘강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치부합니다. 그래서 약함을 무능함, 능력 없음과 동일시 합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제일 힘이 쎈 장미란 같은 역도선수가 결혼해서 핏덩이 아기를 품에 안을 때 금메달 딸 때처럼 안아버리면 아기가 살아남을까요? 힘이 없어서 아기를 여리게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약함에는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가난함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적극적인 가난도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자가 되고싶지만 돈이 없으니 할 수없이 가난한 것 쯤으로 치부합니다. 가난에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하얀 도화지에다 그립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붓터치가 살아납니다. 비움은 채우지 못해서 비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막 이륙했는데 응급환자가 생겼다고 합시다. 미국가지 가면 이 환자가 죽기 때문에 회항을 해야합니다. 이 때 비행기는 그냥 착륙하지 않습니다. 착륙할 때의 중량이 정해져 있으므로 비싼 항공유를 공중에 버려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륙할 때의 중량으로 착륙하면 비행기가 하중을 이기지 못해 대형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기름이 아깝지만 승객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비움의 이런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채우려고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또 침묵을 소외되는 것과 동일시 합니다. 침묵의 적극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너 왕따지?’하고 놀립니다. 사실, 음악은 시장바닥이나 공장에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 중에 연주해야 살아납니다.

우리는 이렇게 얼마나 많은 소중한 가치들을 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가치들은 모두 ‘비움’과 관련있습니다. 느린 것, 낮아지는 것, 약해지는 것, 가난, 침묵 등 이 모든 것이 비움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폐해져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을 이루는 너무나도 소중한 가치들을 인간 스스로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바에야, 이 세상에 맞추어 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사실 노력하는 만큼 잘 안됩니다. 죽어라 뛰지만 나는 놈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는 더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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