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분노의 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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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수사의 강의 중> 신호등 2014.09.26~2015.01.30 까지 연재

내 마음이 평화롭고 여유가 있으면 다른 사람을 받아주고 사랑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평화가 없으면 그가 하는 아주 조그마한 말에도 화를 내기 일쑤이고 내면에 내재된 여러 감정들이 흐트러져 마음이 걷잡을 수 없습니다. 내 이기적인 우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배우자, 자녀를 포함하여 할 수 있다면 이웃까지)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 능력을 길러보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그래서 감정조절, 그 중에서도 특히 ‘화’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장애로 떠오르게 됩니다.

사실,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은 가치관이라든지 생활태도나 습관도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화가 났을 때 그리고 내 안에 미움이 생길 때는 원래의 결심과 의지가 쉽게 좌절되고 맙니다. 상대 앞에서 내 의지나 지향과 전혀 다르게 말투와 어조와 표정이 변하고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며 다시 후회하지만 또다시 비슷한상황을 되풀이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정서나 감정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 중에서도 뚜껑이 열리는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기란 우리 일상인들에게는 불가능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열받는다라는 표현의 쓰임새를 보면 ‘화’라는 감정이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마치 자연스럽고도 인간적인 생활 감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앞으로 여러 호를 통하여 어떻게하면 화를 조절하면서 가정과 이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화를 한번도 내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화를 달고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화를 잘 안내거나 못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위에서 착하다는 평을 받는 그 사람은 화가 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는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안으로 담아두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는 쓰레기통이 하나씩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것은 조그만하고 다른 사람의 것은 아주 큽니다. 살다가 만나는 크고작은 생활쓰레기들(혹은 스트레스)을 우리는 여기에 담습니다. 누군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속으로 “구차하게 이걸 따지자니…”하며 이 쓰레기통에 담아 둡니다. “형님/동생인 내가 참아야지… 집안의 평화가 중요하니까.”하면서 담아둡니다. “참아야지. 인내가 제일 큰 덕목이니…” 이러면서 조금씩 우리 쓰레기통은 쌓여갑니다. 그런데 이 통이 작은 사람은 금새 차서 비워낼 때가 옵니다. 그래서 자주 비워야하고 종종 화를 냅니다. 그런데 이 통이 큰 사람은 웬만큼 차도 괜찮은 듯 보입니다. 그러나 누르고 다지고 하더라도 결국은 차는 날이 옵니다. 큰 쓰레기통이 비워지는 날은 난리가 납니다. 화를 잘 안내는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섭다는 말은 이래서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감정을 담아두는 쓰레기통이 있다. 단지 용량이 크고 작을 뿐이다.

꾹꾹 눌러담은 쓰레기통을 한꺼번에 비우면 나도 다치고 주변 사람도 다치게 됩니다. 살다보면 화가나는 상황은 늘 생기게 마련입니다. 비록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고싶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인간관계를 ‘겨울 밤의 고슴도치’와도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긴 겨울 밤은 아주 춥습니다. 그래서 다른 고슴도치의 따듯한 체온의 도움을 받아보려고 가까이 갑니다. 그러면 찔려서 상처를 받습니다. 아프니까 다시 떨어집니다. 도로 춥습니다. 더불어 사는 인간 사회가 마치 이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혼자서는 외롭고 그래서 다른 사람과 좀 따듯한 인간관계를 나누려고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면 상처를 받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상처는 나와 감정적으로 거리가 있는 사람들과는 잘 생기지 않습니다. 길가는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받아 잠 못이루거나 하는 일은 꽤 드문 일입니다. 항상 가까운 사람, 서로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끼리 상처를 훨씬 더 많이 받습니다. 그 만큼 나를 열어놓고 가까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고슴도치는 찌르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고슴도치라는 놈은 그저 가까이 가면 찔리게 되어있습니다. 생겨날 때부터 그렇게 생겨먹었습니다. 사람도 어쩌면 다른 사람이 싫고 미워서 찌르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혹은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아픔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문을 열고 가까이 가면 갈수록 상처를 주고받을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지는지도 모릅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자 약함입니다. 그래서 ‘겨울밤의 고슴도치’인가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것은, 가급적 어떻게 하면 이런 상처를 줄일 수 있을까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체온도 유지하면서 찔리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을 익혀보는 것. 이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겨울밤의 고슴도치들이다.

그런데, 이런 상처를 주고 받을 때 주로 개입되는 감정이 바로 ‘화’, ‘분노’입니다. 더불어 살아갈 때 상처의 원인제공을 하는 감정입니다. 이는 다른 어떤 감정보다 힘이 쎄고 에너지가 풍부한 감정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쎈 힘과 큰 폭의 에너지를 가진 또다른 감정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감정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께 순종하고 고분고분하던 자녀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 때부터 부모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밤중에 보따리 싸서 도망가기도 합니다. 그 만큼 큰 에너지를 가졌습니다. 이 에너지가 사람을 충동질합니다. 부모님 말을 잘 들어야한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잘 알지만 이 에너지의 힘이 워낙 엄청나서 이성으로 알고있는 것을 뛰어넘는 충동을 받고 행동하게 됩니다. 다행이 사랑은 긍정적인 에너지입니다. 반면에 분노의 감정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참으로 많이 담고 있습니다. 무척 힘이 쎈 감정입니다.

분노의 감정은 시어머니에게도 삿대질을 하게 만들 만큼 큰 폭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과 이성은 천칭 위에 놓인 것과 같아서 분노가 강할수록 이성의 능력은 저하됩니다. 화가 나 있는 자녀에게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득한다 하더라도 효과를 보기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있구나’, ‘속이 상해 있구나’, ‘뭔가 성에 차지 않나 보다’ 하고 느껴질 때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 먼저 자녀의 감정을 안정시켜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라야 비로소 옳고 그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됩니다. 그래서 감정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것이 인격적 성장을 위한 기초가 되며, 이러한 토대가 마련되면 다음으로 사랑의 실천이 보다 수월하게 됩니다.

분노의 감정은 시어머니에게도 삿대질을 하게 만들 만큼 큰 폭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자연은 왜 우리에게 ‘화’라는 감정을 주었을까요? 모든 기능이 그렇듯이 이러한 ‘화’라는 기능이 주어졌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깜짝 놀랄 때 눈이 저절로 커지는 것은 주변에 예기치 않던 상황이 돌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고, 눈이 커짐으로 해서 상황을 빨리 알아차리고 긴장하여 여기에 대처하기 위함입니다. 눈 앞에 물건이 갑자기 날아오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습니다. 눈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몸에 아무 이유 없이 달려있는 기능과 작용은 없습니다. 감정적인 작용 역시 하나하나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분노의 감정은 무슨 기능을 할까요?

첫째로, 우리의 존재를 유지, 지속하게 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개와 마주쳤다고 상상해봅시다. 개가 귀여워서 쓰다듬어 주려고 가까이 갑니다. 그런데 그 개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립니다. 멈칫합니다. 더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개 입장에서는 혹시 모를 공격으로부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림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화를 낸다는 것은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역할을 하며 따라서 좋은(?)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내 머리를 몽둥이로 툭툭 치고 있어도 헤죽거리고만 있다면 ‘이 사람은 맞는 것을 좋아하는 군’하면서 계속 때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화를 벌컥 내면 상대방은 하던 동작을 멈춥니다. 그래서 분노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이 주신 감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화는 나를 보호할 수 있는 큰 힘입니다. 생체학적으로도, 화가 난다는 것을 알아차린 우리 두뇌는 호르몬을 분비하여 우리 육체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얼굴을 비롯한 몸의 모든 근육을 긴장되게 만듭니다. 화가 나면 웃기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런데도 웃어야 할 상황이면 긴장된 얼굴근육 위에 ‘쓴 웃음’이 나타납니다. 한편, 긴장된 근육들을 유지시키려면 더 많은 산소공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숨이 가빠지고 혈액순환이 빨라집니다. 혈액이 얼굴에 몰려 시뻘개지는 상황도 발생합니다.

분노의 감정은 분명 존재 이유가 있고, 그 첫번째로 화는 우리를 보호하는 좋은 기능을 하는 감정, 우리를 지키는 큰 힘으로 작용한다.

육체는 화가 나면 호르몬에 의해 주먹부터 얼굴까지 근육이 긴장되고 그 긴장을 유지시키려고 혈액이 몰리고 그래서 산소 공급이 빨라져 숨이 거칠어집니다. 혈액이 얼굴로 몰리면 얼굴이 시뻘개지기도 하고 아래로 몰리면 얼굴이 창백해지고 손으로 몰리면 손에 땀이 나기도 합니다.

두번째로, 화가 나는 것은 하나의 신호이기도 합니다. 아침에 우유를 마셨는데 배가 살살 아프고 통증이 있습니다. 뭔가 배 속에 비정상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알아챕니다. 두통은 머리 속에 뭔가 비정상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니 빨리 대책을 강구하라는 신호입니다. 약국이나 병원으로 가든지, 아니면 평소 알고 있는 대처법을 즉시 시행하라고 알려줍니다. 육체적인 통증은 우리를 지키기 위한 좋은 기능입니다. 통증이 없다면 우리 배나 머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어느 날 덜컥 죽게 될 것입니다. 통증은 이렇듯 고마운 신호 역할을 합니다. 육체적인 통증과 마찬가지로 화는 내면적, 심리적, 감정적 평화가 깨어졌으니 빨리 회복하라고 알려주는 신호 역할을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화는 좋은 것이고 긍정적인 목적과 이유를 가진 감정입니다. 화가 없다면 우리 내면세계가 파괴되어도 우리는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보호하고 지킬 수가 업게 되어 우리 존재를 이 지상에서 유지 지속시키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화를 잘 못내는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많이 담고 살아갑니다. 그 만큼 속은 썩어 들어갑니다. 병이 있고 아픈 데가 많아집니다. 그렇다면 화를 자주 내는 것이 무조건 좋을까요?

화 자체는 건강하고 좋은 이유를 가진 감정입니다. 어려운 것은, 화를 어떻게 표현해내느냐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파괴적으로도 되고 건설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배가 아프다고 해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상을 뒤엎고 옆 사람을 발로 찬다면 육체적 통증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화가 나도 건강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알고 있다면 화는 우리에게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불행히도 우리 대부분은 화를 건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가정에서도 잘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학교 교과과목에도 없습니다. 대학 교양과목에도 없습니다. 학원이 그렇게 많아도 화를 건강하게 관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는 무의식 중에 화를 관리하는 방법을 부모로부터 배웁니다. 아버지가 화가나니 상을 둘러 엎으시더라. 엄마가 화가나니 방에 들어가 문고리잡고 우시더라. 아이는 화가나면 저렇게 표현하는 것이구나 하고 배웁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자라면서 화를 건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였고 부모님이 화내시는 모습을 보며 그대로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화를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화의 목적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화는 자연의 선물입니다. 비단 화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감정도 마찬가지로 그 존재 목적이 있으며 자연의 선물, 은총, 축복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그 감정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느끼고 싶어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떻게 이런 감정들을 표현하고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숙제이고 책임이 따르는 부분입니다. 성경에서조차 ‘화를 내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에페소서).’ 라는 권고가 있습니다. 저자는 화와 죄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며 화 자체가 죄는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질투는 죄일까요? 모든 감정은 축복이고 선물이니 질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웃집 여자가 나보다 뭔가를 훨씬 더 잘했습니다. 질투가 생깁니다. 이 때 그 여자를 깎아내리고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내 질투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 한 게 아니야. 주위 사람들이 다 도와준 것 뿐인데 저렇게 잘난 체 하는 군.” 그런데, 이와 반대로 자기를 독려하고 노력하는 방향으로 질투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저런 것을 보니 나도 잘 할 수 있겠는 걸.” 건설적으로 질투심을 사용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질투심을 전자와 같이 부정적으로 많이 표현하고 사용했기 때문에 질투는 나쁜 것이라고 인식되고 있습니다. 화도 그렇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화를 나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화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화를 표현하는 방법이 나쁜 것일 터입니다. 그렇다면 표현하는 방식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면 화가 내 안에 많이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덜 될 것입니다.

화를 잘 표현하기 위해 먼저 화가 나는 이유를 뿌리부터 살펴봅시다. 왜 화가 날까요? 우선, 의도했던 바나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화가 납니다. 선생님이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구석에서 학생이 졸고 있습니다. 열심히 들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화가 납니다. 둘째로, 내 권리, 내 존엄성, 내 자유를 다른 사람이 침해하거나 간섭한다고 느끼면 화가 납니다. 방학 동안에 실컷 놀다가 오랜만에 맘잡고 공부해야지 하고 방에 가서 책장을 넘기는데 밖에서 엄마가 고함을 지릅니다. “공부 안하고 뭐해!” 책을 확 덮어버리고 공부 안 하게 됩니다. 공부하고 안하고는 내가 선택해서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문제인데 엄마가 하라 마라 하는구나. 이제는 다 커서 선택할 수 있는 어른인데… 엄마는 내 자유를 침해한다. 그래서 책을 덮고 오히려 반대로 나갑니다. 내 존엄성, 자유, 권리를 침해 당하였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는 때는 나의 의도나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그리고 내 권리와 존엄성과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느낄 때이다.

이어서 셋째로, 뭔가 공평하지 못하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낄 때에도 화가 납니다. 길을 가는데 어떤 ‘덩치’가, 약해보이는 사람을 때리고 있거나, 뉴스에서 부정부패 이야기가 들리면 내가 직접 당하거나 피해보는 것은 아니지만 보고 있을 때 열 받습니다. 뭔가 공평하지 못하고 형평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지 못할 때 화가 납니다. 예를들어, 피곤해서 쉬고싶은 데 쉬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짜증이 나고 쉽게 화가 납니다. 평소에는 쉽게 넘어가는 말도 몸이 피곤한 상황에서는 배우자에게나 자녀에게나 할 것 없이 짜증을 내게 됩니다.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 이유 중에서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경우를 짚어보겠습니다. 내 기대가 채워지지 않는 경우에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할까요? 다른 사람들은 내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나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고해서 화를 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납니다. 물론 많은 경우에 정당한 기대도 있습니다. 예를들어, 결혼의 경우 부부 서로간에 문서로 서로 계약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부부로서 가지게 되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나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기대 때문에 다른 사람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버립니다. 마치 그 사람들이 내 기대를 채워 주어야 마땅한 것처럼 여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 기대를 채워주어야할 의무나 책임이 없습니다. 다행히 내 기대대로 살아주고 움직여준다면 감사하고 고마울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쪽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내 기대대로 살아주시오 하고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가까운 사람끼리 더 많이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조차 잘 모릅니다. 어떤 사건에 부딪힐 때에 비로소 ‘아 내가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구나’하고 알게됩니다. 본인조차 본인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데 다른 사람들은 나의 기대를 알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가 펄펄 뛰면 당하는 사람은 억울하고 황당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이유가 아무리 있어보여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화나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경험들은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특정한 행동이나 표정이나 태도나 말투를 보거나 듣고 내가 나름대로 해석하여 내가 화를 내는 것입니다. ‘저 말은 나를 무시하는 거야.’하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 나를 화나게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쁘게도, 슬프게도, 억울하게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 내 인생은 누구의 것일까요?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는 아직 우리가 어린아이일 때, 성숙하지 못할 때 이것이 가능합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판단, 관점, 태도, 자극들에 영향을 받아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분노도 화도 그렇게 결정됩니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 감정들은 모두 나의 것이요 내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내가 그 감정을 일으킵니다. 화도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내가 내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을 때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내지 않습니다. 무엇때문일까요? 각자가 받아들이는 관점, 태도, 해석의 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화나게하기 위해 비아냥거리고 있는데 그 사람이 비아냥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화가 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알아듣느냐에 따라 화가 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던져진 말 보다는 그것을 어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른 사람이 나를 화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화는 내 안에 있는 어떤 관점이 나를 화나게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 관점은 정당하고 객관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 사람은 나를 칭찬하려고 던진 말인데 나는 그가 나를 놀린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화가 납니다. 그래서 내가 화를 내면 그 사람은 참 억울합니다. 다음부터는 칭찬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객관적인 대상에서 자극받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판단, 혹은 의미부여에 따라 화가 나기도 하고 안나기도 합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화를 표현하는 방식을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에 파괴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능하는 감정인데 이런 방어기제 중에는 ‘공격성’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상대를 먼저 제압해버리면 내가 공격받을 위험이 그 만큼 줄어듭니다. 그래서 이 공격성도 나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힘이나 메커니즘으로서 내 안에 있는데 문제는 화와 공격성이 유사하기 때문에 쉽게 둘이 결합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화가나면 쉽게 공격성을 띠게 됩니다. 이 분노와 공격성이 결합이 될 때 외부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고 내부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격성을 외부로 표현한다는 것은 총구를 바깥으로 들이대는 것이고 내부로 표현한다는 것은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들이대는 것입니다. 외부로 표현하는 것은 직접 혹은 간접 혹은 산발적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공격성과 결합된 화는 흔하지만 잘못된 표현방식입니다.

화는 공격적인 성격과 너무나 쉽게 결합하면서 외부로 혹은 내부로 향하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표현할 때는 내가 화나는 대상에게 나도 직접 똑같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총을 한방 쏜다면 나도 역시 같이 쏘는 것입니다. ‘너는 뭐가 잘났니? 너나 잘해라.’라는 식입니다. 간접적인 표현방식은, 그가 나에게 총을 쏘았다 해서 나 역시 쏘았다가는 그 다음에 대포알이 하나 날아올 것 같다, 그런데 나에게는 대포가 없다 라는 생각이 들 때 반응하는 방식입니다. 직접 쏘다가는 큰일 나므로 간접적으로 곡사포를 쏩니다. 숨어서 상대가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도록 애매하게 쏩니다. 비아냥거린다든지, 뼈있거나 가시가 있는 농담을 던진다든가, 혹은 침묵을 지키거나 대화를 단절해버립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화가 날 경우 말을 아예 안해버리는 경우 등은 간접적으로 하는 공격방식입니다. ‘당신과 친교를 끊을테니 혼 좀 나보세요’ 하는 태도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그를 험담하는 방식으로도 간접적인 공격성이 드러납니다. 어쨋거나 직접적으로 공격했다가는 돌아오는 후환이 두렵고 나에게는 힘이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에둘러서 간접적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발적으로 표현하는 공격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화가나는 대상이 어떤 의미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대상이 모호한 경우입니다, 내가 고심해서 인생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업을 벌일 때마다 망합니다. 어떤 계획을 세울 때마다 어떤 장애가 생겨서 일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팔자가 왜이럴까, 내 인생은 왜 이다지도 꼬이기만 할까?’하면서 화가 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화가 날까요? 나 자신?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내 운명, 아니면 팔자, 신앙인들의 경우 하느님에게 화가 납니다. 그런데 이런 ‘운명’ ‘팔자’ ‘하느님’ 등은 대상이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공격하기가 애매합니다. 이럴 때 화를 표현한다면 산발적으로 표현합니다. 눈에 얻어 걸리는 사람이 바로 타깃이 됩니다. 깡통이 있으면 깡통이 나르고 강아지가 지나간다면 강아지가 깨갱하게 됩니다. 외향적인 사람은 밖으로 화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내향적인 사람은 화를 외부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자기에게 이런 분노를 표현합니다. 말투에서도 표가 납니다. 외부로 표현하는 사람은 ‘너 맞을래, 너 혼난다’ 식으로 표현하고 내부로 표현하는 사람은 자기를 공격하는 말투를 사용합니다. ‘그래 내 죽여봐라, 때려봐라 때려봐’라는 식입니다. 화를 내부로 표현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육체가 공격당합니다. 여기저기 몸이 아픈 데가 많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그냥 마음 차분히 먹고 여유를 가지고 좀 쉬세요 라는 조언을 자주 듣습니다. 실제로 아픈 곳이 있어 진단을 받기도 합니다. 다음으로는 내면 혹은 마음이 심리적으로 공격을 받습니다. 마음이 분노로 가득차있고 그것이 나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에 마음 자체가 평화가 없고 여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뭔가 불안합니다. 불안하고 안정되어있지 못한 마음을 내가 견뎌내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곳에 자신의 신경을 쓰고 관심을 쏟기 위해서 어느 한 두가지 일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지나치게 일에 빠진다거나, 지나치게 쇼핑에 빠져들거나, 도가 지나치게 취미생활에 빠지거나 합니다. 술이나 마약, 혹은 성에 탐닉하는 것들도 모두 자기 내면으로 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화를 자기 내면을 향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밖으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의 스스로의 몸과 심리가 공격당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정신이 공격받습니다. 이것은 우울증의 한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화로인해 우울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화가 자기자신을 벌주고 공격하는 쪽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내가 먹기는 잘도 먹는군.” 이러면서 입맛이 떨어지면서 식용부진이 오기도 합니다. “잠은 잘도 자는군.”하는 순간에 불면증이 옵니다. 불면증 역시 자신을 공격하고 벌주는 방식입니다. 심각한 상황이 되면 “이런 내가 살아서 뭘해.”하며 자살을 시도합니다. 결국은 이 분노가 공격성과 결합해서 자기를 공격하는 쪽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은 결코 건설적이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화를 건강하고 건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표현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한단계 한단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에는 네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인식의 단계, 수용의 단계, 분석의 단계, 행동의 단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식의 단계는 내가 화났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단계입니다. 먼저 알아차려야 통제를 하든 관리를 하든 뭐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차리는가는 비교적 쉽습니다. 보통 내 안에서 화가나면 그 초기에 벌써 내 육체에서 조금씩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물어보면 내가 화가 날 때 그 초기증세를 다 알고 있습니다. 눈이 커진다든지, 말이 빨라진다든지, 얼굴이 벌게진다든지, 숨이 가빠진다든지, 말을 더듬는다든지 등등 집안 식구들은 다 알고 있는데 본인만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화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화는 나쁜 것이라고 인식되어왔고 자기 화를 누르는 데에 훈련되어 왔기 때문이죠. 주변사람에게 물어보면 화났을 때 외형적으로 바뀌는 내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두면 나의 초기증세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식의 단계라고 말할 수 있고 이것부터 우리가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수용의 단계입니다. 이제 화가 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다음에는 이 화를 누가 내고있는지 판단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화를 내고 있고 이 화는 나의 것이고 바로 내가 풀어야 한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주체가 바로 나이고 화의 일차적인 책임은 내가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평화로울 때는 이것이 수긍이 되지만 막상 화가나는 순간에는 ‘그게 왜 내 잘못이야’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화는 나를 화나게 한 사람이 풀어줘야하고 그 때까지 나는 입이 이만큼 나온 상태로 며칠 말도 않고 그냥 기다리게 됩니다. 이것은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이 화는 내 화고 내가 내고 있고 그러니 내가 관리해야한다는 것을 받아드리는 단계를 수용의 단계라고 합니다. 이것은 첫번째 단계보다 쉽지가 않아서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세번째는 분석의 단계입니다. 열받아 죽겠는데 분석이고 나발이고 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처음 연습할 때에는 단계별로 연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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