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촉 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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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니 부스스한 눈 사이로 막내가 입을 벌리고 자는 모습이 보였다. 이 놈은 9살이나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엄마 아빠 사이에서 잔다. 깨어 있을 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뽀뽀를 할 기회였다. 자고 있는 볼에 입술을 대려는 순간 역시 귀신같이 알고 잠결인데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다시 잠든 틈을 타서 결국 뽀뽀를 하고야 말았다. 여자애들은 어거지로 하는 거 극혐이라고 아내는 누누이 나에게 주의를 주었었다. 그렇지만, 이젠 어거지로 하지 않으면 도저히 뽀뽀를 할 수 없으니 다른 도리가 없다.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천성적으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라온 환경 탓인지 잘 모르겠다. 남에게 나눠줄 만큼 마음의 곳간이 그리 넉넉지 않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런지, 사고 방식이나 생활의 초점이 ‘관계’ 중심이 아니라 주로 ‘업적’ 중심이다. 관계를 통해 치유를 받기보다는 성과를 통해 치유 받으려고 한다. 공동으로 무엇을 하기보다는 혼자 빈둥거리거나 혼자 꼼지락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자신의 경계를 침범하면 화를 내는 것이다. 가끔, 생각하고 있었던 아주 사소한 계획이 가족 때문에 틀어질 때가 있다. 이것을 하고 그 다음에 저것을 하고 그 다음에 언제 몇 시쯤에 이것을 해야지 했는데, 갑자기 아내가 무엇을 부탁하거나, 애들 라이드를 해야 하거나, 저녁 준비를 해야 할 일이 생긴다. 계획이라고 해봐야 그냥 계획일 뿐이고, 틀어진다고 해봐야 고작 몇 십 분 늦어지는 정도일 뿐이다. 그런데도, 관계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은 일이 끊어지거나 방해 받는 것에 심한 짜증을 내게 된다. 심지어 혼자 빈둥거리는 시간도 방해 받지 않기를 원한다. 방해를 받으면 마치 자유를 침해 당한 듯한 느낌을 갖는다. 자신이 신경 쓰던 일이 있으면 온통 거기에 관심을 두느라, 심지어 자기 자녀들의 웰빙에 할애하는 시간도 힘들어 한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학이 거의 다 지나고 말았다. 역시나 아이들과 같이 놀아준 시간이 거의 없다. 이번 방학에는 막내에게 테니스를 가르쳐 주려고 마음먹었었다. 결국 단 한번 야외 코트에서 연습 볼 던져준 게 고작이다. 생각해 보면 이번 방학 때 같이 시간을 보낼 기회는 아주 많았었다. 그 시간에 나는 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그리고 막내는 게임을 하거나 하루 종일 유투브로 다른 애들이 게임하는 것을 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첫째와 둘째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둘째 아이는 하루 종일 자기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지냈다. 하루는 친구랑 학용품 사면서 바람을 쇠고 싶다며 차를 태워달라고 했다. 방학이 지루했었는지, 아이는 다시 학교에 가는 것이 싫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다려진다고 했다. 개학이 눈앞에 다가오기는 했다 보다.

돌아오는 길에, 펜에 혹해서 자기도 모르게 비싸게 샀다며 내게 말을 건넨다. 요즘 들어 펜에 집착이 간다고 했다. 볼 두께마다 느낌이 다르고 브랜드 마다 또 감촉이 다르다고 한다. 펜 두께는 어떤 것이 자기한테 맞는지, 똥은 얼마나 나오는지, 붓 스타일이 좋은지 등을 인터넷으로 검색한단다.

“내가 너무 집착하나요?”

그건 그 만큼 네가 글을 쓰는 데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말해 주었다. 우리에게 눈은 그냥 많이 내리느냐 적게 내리느냐이지만, 에스키모에게는 눈을 표현하는 단어가 50개나 된다고 들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지 못하는 사이에 둘째는 문방구에 집착하고 있었다.

막내의 경우에는 아침에 눈떠 그 아이가 자고 있는 것을 볼 때에만 애정이 복받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수영을 좋아하고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지만 내심 모른 체 한다. 아주 아기일 때도 내가 돌봐야 될 때면 어떻게든 기를 쓰고 재우려고만 했다. 아이의 정서와 발달을 위해서 좀 놀아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관계지향적이지 못한 성격은 일종의 결함일까? 결함이라면 아무래도 대물림될 것만 같아서 걱정이다. 키 작은 사람이 키 큰 유전자를 자식에게 물려주기 어렵고,

검은 피부가 하얀 피부를 물려주기 어렵다. 대물림이라고는 하지만 ‘없다는 것’이 대물림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애정결핍을 대물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뭇가지라면 어디 좋은 나무에 접이라도 붙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한다 해서 초라한 영혼이 갑자기 거룩하게 변할까? 내 힘으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좋은 열매를 맺기에는 어째 좀 희망이 없는 것 같다.

만약 아이들이 잘 자라준다면 이것은 운이 좋거나, 아니면 아내 덕분일 것이다.

관계로도 치유받지 못하고 성과로도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는, 애정결핍증을 겪고 있는 한국 중년남자는 어디서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문제 같은데 어떤 한계가 보인다. 한국에서는 100촉짜리 전구인줄 알았는데 캐나다에서 살다 보니 자기가 5촉 짜리 전구인 것을 알게 된 사람이 겪는 자괴감….

얘들아, 미안하다. 아빠는 애정 불구자이지만 5촉이라도 밝혀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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