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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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아이들이 개학하는 날이다. 아이들의 도시락과 학교 라이드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워진다. 큰 애와 둘째 아이 두 명에게는 거의 우격다짐으로 오후에 학교에서 걸어오도록 했다. 큰 애는 흔쾌히, 둘째는 칭얼거리며 받아들였다. 막내는 아침에 학교가 시작되는 공원 입구까지만 같이 걸어가기로 했다. 이렇게만 해도 작년보다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도시락이 제일 문제다. 이리저리 궁리하다가‘집밥 백선생’의 ‘만능 중국소스’와 ‘만능 맛간장’을 알게 되었다. 만능 중국소스만 있으면 번갯불에 콩 굽듯이 도시락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미리미리. 일단 식용유에 파를 볶다가 단백질류(돼지고기, 닭고기, 햄, 계란, 소시지, 새우 등)를 추가하고, 그러다가 ‘만능 중국 소스’를 뿌려서 같이 볶다가 마지막에 밥을 섞어주면 볶음밥이 된다. 좀 사치를 부리자면 냉동야채(콩, 당근, 옥수수 섞어놓은 것)를 사다가 조금씩 첨가해주면 폼이 난다. 밥 대신에 피망을 잔뜩 넣으면 고추잡채로 둔갑하기도 한다. 아니면 피망 대신에 숙주를 잔뜩 넣고 볶아도 된다. 마지막에 참기름이나 식초로 맛에 에지를 넣어 준다. 요놈들을 토틸라(tortilla)에 말아도 좋은 도시락이 될 것 같다. 고기류만 미리 일주일 치 정도 손질해서 보관해둔다면 초스피드로 도시락을 준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상상하는 대로 잘 되었으면 좋으련만.

저녁 준비는 늘 아내와 신경전을 벌이는 항목이다. 요즘은 요리가 취미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나 보다. 아내와 자녀들이 맛있게 먹을 때 희열을 느낀다나?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 감정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에게는 음식 준비가 늘 스트레스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에게는 저녁 준비가 늘 가정 불화의 씨앗이고 전쟁의 도화선이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 이번 참에 특대 버너와 특대 냄비를 아마존에서 구입할까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자녀들이 독립하고 나서 어머니들이 남편들에게 대량으로 해 준다는 그 유명한 음식, 사골곰국을 만들어보기 위해서이다. 어머니는 사골곰국을 일주일 치 이상으로 고아놓고 남편보고는 알아서 밥을 챙겨먹으라고 한 다음, 산으로 들로 인생을 향유하러 다닌다고들 들었다.

일주일 치를 우려 놓고 미리 냉동해서 준비해 두면 그 마음이 얼마나 여유로울까 생각하니 나 역시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다. 곰탕이 지겨워지면 떡국, 만두국, 떡볶이, 김치찌개, 된장찌개, 미역국, 우거지국 등 그 무한한 응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틈날 때마다 한 바께스씩 해 놓고 얼려두어야지. 음홧홧. 능숙해지면 육개장 같은 것도 한 바께스.

저녁 시간에 식탁에 둘러 앉았다. 생물학 쪽의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커서 ‘알약’을 개발해보라고 주문했다. 한끼에 해당하는 칼로리와 필요한 영양소가 모두 들어있는 알약…… 군인들에게도 엄청나게 팔릴 것이고, 어디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알약 한 봉지면 든든할 것이다. 혼자 상상만으로도 흐뭇해하고 있는데 둘째 아이가 한마디 한다.

“그럼 우리가 모여서 저녁 식사하는 시간이 없어지겠네요?”

얼마 전에 어떤 지인이 한국에 다녀왔다. 그는 한국에서의 시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매여 있던 일상에서 놓여나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졌지만, 막상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일은 거의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빠듯하게 살던 여기 런던에서는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할 수 있던 일이었다고 한다.

“시간이 많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하긴, 나도 작년 겨울에 한국에 2주일 방문했을 때 비슷한 것을 느꼈었다. 귀찮아 하던 모든 일에서 놓여났는데도, 그리고 가족과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곳을 돌아다녔는데도, 여기서는 기를 쓰고 틈틈이라도 하던 일들을 거의 하지 못한 것이다. 시간 나면 흠뻑 빠져보고 싶다고 늘 아쉬워했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시간과 금전에 여유가 있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지는 않나 보다. 막상 형편이 되면 나태하게 흩어버리기가 일쑤이다.

내가 원하던 알약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이것이 그렇게 기뻐할 일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자유는 가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쓸모 있게 사용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차라리 지금을 행복하다고 해야 할까? 매번 전전긍긍하며 파닥거리는 삶이 차라리 권태보다는 나은 것일까? 하긴, 행복은 늘 눈앞에 있는 것 같았지만 막상 따라잡은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 들어가면, 1학년 때는 3학년 되면, 3학년 때는 대학만 가면 인생이 행복해질 줄 알았다. 대학 때는 군대만 갔다 오면, 갔다 와서는 취직만 하면, 취직해서는 결혼만 하면, 결혼해서는 대리만 되면, 과장만 되면, 부장만 되면…… 아마 나는 무지개가 닿은 곳을 찾으려 달음질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 곰국 한 바게쓰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어코 버너와 특대 냄비를 장만하고야 말 기세이다. 그러나 곰국을 우려내는, 지루하고도 긴긴 과정을 이제는 좀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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