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항아리 속 바윗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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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달팽이를 만났다. 어린 시절 졸졸 흐르던 개울 옆 앵두나무 그늘진 우물 가에서 기어 다니던 그 달팽이였다. 온타리오 당국은 주택가 잔디에 ‘미용’을 목적으로 하는 독한 제초제를 뿌리지 못하게 한다. 제초제를 뿌려도 잎이 있는 잡초만 시들 뿐, 잔디 비스무리한 것들은 제초제를 조롱하듯이 팔팔하다. 달팽이가 주택가 근처에서 저리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주 당국자들의 결정이 참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다람쥐도 토끼도 신나게 주택가 잔디를 누빈다.

런던은 자연과 더불어 살기에 좋은 곳이다. 가까운 토론토만 하더라도 주변에 공원도 많고 자연보호구역도 많지만 그런 곳들은 마음먹고 찾아야만 접할 수 있다. 막상 생활하고 거주하는 공간은 시멘트와 아스발트 투성이다. 그런데 런던은 생활 주변 자체가 자연으로 둘러싸여있다. 도무지 포기하고 싶지 않는 환경이다. 런던 비행장에서 헬기 훈련을 받던 어떤 한국 조종사는 헬기를 타고 런던 상공을 내려다 볼 때면 그 푸르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나무도 유난히 많을뿐더러, 짐승들도 흔하다. 집으로 향하는 밤길 으쓱한 주택가에서 느닷없이 사슴을 만나기도 하고, 운 좋으면 골프장에서 마른 여우가 지나가는 것도 볼 수 있다. 밤길에 스컹크를 마주치고는 서로 긴장의 순간을 주고 받기도 한다. 캐내디언 구스와 그라운드 호그와 다람쥐는 귀찮을 정도로 지천이다. 맑은 여름 저녁에 집 밖을 나설 때면 청정지역에만 산다는 반딧불이 은하수처럼 흘러 다닌다. 때로는 어렸을 때만 볼 수 있었던 메뚜기를 다시 만나 향수에 잠기기도 한다.

한국에도 시골로 가면 공기 좋고 자연이 아름답지만, 사람들이 무리지어 사는 도시가 이렇게 착하기란 도무지 쉽지가 않을 것 같다. 가끔 한국 뉴스를 듣거나 미국의 자연재해 소식을 접할 때면 더욱 이 조그마한 런던에 애착이 간다. 사람들로 치면, 캐나다 현지인들 사이에서 조차도 꼬장부리는 영국계가 득실하기로 소문났지만, 점점 이민자가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으니 그들 마음도 점점 개방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밖으로 주변 환경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하더라도,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면 인간 실존의 고달픈 문제들이 어김없이 짐짝처럼 따라 다닌다. 좋은 환경에서 산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처지이건 잘 사는 법을 미리 터득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고군분투만 하다가 어느 새 생을 소진하고 말 것이다.

어떤 처지에서건 잘 살도록 힌트를 주는 좋은 비유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학생들 앞에서 항아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주먹보다 큰 돌들을 그 안에 채웠다. “자,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하고 선생은 물었다. 학생들은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은 이제 작은 자갈들을 테이블 아래에서 꺼내어 항아리 안의 큰 돌 사이사이를 채웠다. “자, 항아리가 찼나요?” 그러자 학생들은 “글쎄요”라고 대답했다. 이제 선생은 돌들 사이 빈틈을 모래로 흔들어서 채웠다. “이제는 다 찼나요?”하자 학생들은 “아니요.”라고 말했다. 그 옆에 있는 물 주전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맞습니다.” 하면서 항아리에 물을 부었다. 선생은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자 한 학생이 “빠듯한 스케줄 가운데에서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면 한정된 시간 안에 굉장히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선생은 의외로 “아닙니다.” 했다. “요점은, 맨 먼저 큰 돌을 넣지 않는다면 그 항아리에 영영 다시 그 큰 돌을 넣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참 영리한 설명인 것 같다. 내 식으로 이해하자면, 가장 큰 돌은 ‘어떠한 처지에서건 잘 사는 법’이다. 그것을 먼저 넣는다면 나머지 것들은 넣으면 좋고 못 넣어도 그닥 상관이 없다. 근데 그 큰 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분분하다. 금슬 좋은 부부관계와 화목한 가정? 건강과 좋은 취미? 좋은 집과 경제적 안정? 자아실현할 직장과 전문가로서의 평판?

항아리에 큰 돌을 먼저 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찾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은 아니다. 좀 고차원적이고도 약간 섬세한 수고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이 작업을 하려면 이것도 성취해보고 저것도 성취해보고 그것이 시련에도 살아남는지 경험도 해봐야 하는데 보통의 우리들은 여기에 전념할 시간도 여력도 없다. 뭐 하나 가져본 적이 없고, 설사 그 하나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잃지 않은 채 다음 것을 가지려고 애쓴다.

달팽이는 새끼를 낳지만 그 새끼를 자기가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는 뭔가 통로나 도구로서의 쓰임새랄까?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존재는 내 부모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어쩌면 ‘내가 왜 이 세상에 이렇게 던져져 있나’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리 캐나다 런던이라는 좋은 환경에 있어도 잘 살지 못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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