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행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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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철 교수

강의를 고사하다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 행복에 관한 관심이 많고 그런 노력들이 있는데 좀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고 그것을 공유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첫번째 걱정은 이렇습니다. 행복이 지나치게 숙제처럼 되고 있다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인간은 강요받게 되면 하기 싫어지게 마련입니다. 지금처럼 ‘행복해야 된다’라는 것이 의무로만 다가오게 되면 ‘행복하고 싶지 않다. 그게 내 권리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오게 마련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행복이 부담이 되고 있고 약간 집착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런 염려의 부분적인 이유는 국가의 행복을 측정하기 시작하는데 측정하는 것까지는 좋은 일이지만 그것에 순위까지 매기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순위를 매기게 되면 조사기관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50위권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 이후로 우리는 최소한 16강 안에는 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기 때문에 국가 행복에서 50위 권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행복 순위를 끌어 올려야한다는 일종의 강박적인 생각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행복이란 남들과 비교하지 않을 때 경험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입니다. 행복하자고 하면서 행복에 가장 안좋은 비교를 하면서 저 나라보다 더 행복해져야된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걱정은 일부 얘기긴 하지만 사람들이 행복을 지나치게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작은 일에만 치중하는 사람들로 보면서 사회 정의라든지 불평등이라든지 하는 문제에는 둔감하다는 견해를 가지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큰 이슈들에는 눈을 감아도 되느냐 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걱정은 이렇습니다. 어떻게 행복하게 살것인가 하는 것도 당연히 중요한 주제이긴 하지만 행복이 도대체 무엇이고 왜 행복을 추구해야 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근본적인 문제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근본적 문제에 대한 고민보다는 너무 빨리 항상 어떻게 사는게 행복한 것인지하는 실천적인 방법에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복에 관한 모든 논의를 하기 전에 반드시 물어야 되는 질문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왜 나는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주제입니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진 아주 강력한 동기 하나를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경험에 대해서 ‘평가’를 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점심에 먹었던 식사에 대해서 평가를 합니다. ‘맘에 들었니? 맛있었니?’오늘 강의를 듣고 끝난 다음에도 ‘강의 어땠어? 마음에 들어?’ 하고 소개팅을 받았다면 ‘마음에 들어?’ 하고 묻습니다. 이것이 가장 관심있는 질문입니다. ‘마음에 들어?’하는 질문은 도처에 널려있는 질문이고 이 질문의 의미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내가 어떤 물건을 소비했다하면 소비자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그 행위가 바로 ‘맘에 들어?’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통해 내 삶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내가 행복한가 하는 질문은 맘에 드느냐 하는 질문의 대상을 내 삶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단순히 음식, 하고 있는 일 등 하나가 아니라 ‘내 삶 전체가 마음에 들어?’하고 질문하는 것, 그것이 내가 행복한가 하는 질문이라는 거죠. 소비자로서 내 주권을 행사하듯이 내 삶의 주인으로서 ‘맘에 들어?’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자 일상적인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특별한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거나, 모든 일을 다하고 이제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아니라 남녀노소, 삶의 어떤 단계 상관없이 늘 던질 수 있는 ‘맘에 들어?’와 같은 질문 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주제가 아니라 가까이에 있고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할 주제라는 것이죠.

그런데 너무나 당연해보이는 이 질문 속에 조금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집에서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줍니다.그리고 물어보죠. ‘맛이 어때?’. 솔직하게 얘기하죠. ‘좀 짜’. 그런데 엄마는 ‘그냥 먹어’ 합니다. 그러면 그냥 먹어야 됩니다. 특히 남자들은 그냥 먹게 되지만 속으로는 ‘이럴 거면 왜 물어봐’ 하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도 상사와 부하직원들 간에 상사가 ‘오늘 점심 뭐 먹을까?’ 하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랫사람들이 의견을 내어도 결국 상사가 먹고싶은 것을 먹게되면 부하직원들은 ‘왜 물어봐?’하고 생각합니다. 무슨 얘기냐하면 “맘에 들어?”라는 질문의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그것을 고칠 수 있다라는 확신이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맘에 들어?’라고 질문을 던졌지만 결국 거기에 대해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부질없는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됩니다.

행복이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본 사람들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해야 한다,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인류의 초창기에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 자연재해, 사람들 사이의 폭력과 전쟁 등으로 늘 죽음과 고통을 달고 살았다고 얘기합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위 행복이라는 것은 그 수많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환경들 속에서 운 좋게 오래 살아남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내가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 혹은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 정말 운 좋게 나에게 뭔가가 주어지면 그것을 행복으로 봤다고 학자들이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행복이라는 개념 속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곧바로 얻을 수 있다, 얻어야만 한다 라는 개념과, 운이 좋아서 주어지는 개념이라는 것이 같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흔적이 어디에 남아 있느냐 하면 각국의 언어에서 행복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보게되면 그 속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영어의 Happiness 중 happ은 ‘우연히 발행하다’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불어의 Bonheur(행복)은 bon(좋다)+heur(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독일어의 Gluck(행복)은 여전히 ‘행운’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이태리, 포르투칼, 스페인어에서 행복이라는 말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felix도 ‘행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의 ‘행복’이라는 한자를 보면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다행히 복으로 주어지는 것’ 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질문은 늘 던질 수 있는 질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는 운 좋게 내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개념도 같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이미 내게 운 좋게 찾아와 있는 복이 있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발견’하는 행복을 허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너무 강박적으로 ‘얻거나 쟁취해야 되는 것’ 이렇게 부담스러운 숙제로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어느 부분에서는 여전히 삶이 힘겨운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노력한다고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열악한 삶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행복은 노력하면 얻는 것이라고 우리의 견해를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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