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언저리마다 너를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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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가을 하늘이다. 그러나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다들 그저 자신의 일로 골몰하고 있다. 창 밖에는 단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따뜻한 날씨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던 나뭇잎들도 드디어 대세를 파악했나 보다. 울긋불긋한 색들은 회색 하늘을 아랑곳하지 않고 올해의 마지막을 외친다. 이 계절의 아우라는 간장종지 같은 마음들 마저 차분해지게 하고 있다.

다시 커피를 시작했다. 몸은 절제를 잃고 마음도 과녁을 벗어난다. 길 잃은 마음에 둘째 아이가 들어온다. “아빠, 기도문 몇 개 외운다고 신을 믿게 되지는 않아요.” 둘째는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사고가 자유분방하다. “아니, 신이 있다고 믿지만 아빠가 믿는 그런 신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좀 궁금했다. 바다 같은 신일까? 사람은 물방울 같아서 죽으면 커다란 바다로 합쳐진다고들 한다. 우주의 일부분으로 승화된다고나 할까. “잘 모르겠어요. 그냥 세상사에 그리 관여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어쩌면 사람은 죽어서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런 것일 수도 있고요.”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어쩌면 놀이터를 지키는 신일까? 부모들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마음 가는대로 놀게 하듯이 늘 지켜보다가 위험할 때 뛰어가서 보호해 준다. “그냥 아직 모든 게 열려있어요.”

어렵다. 그냥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입양한 강아지가 고마웠다. 늘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둘째는 요즘 강아지가 있는 1층으로 자주 내려와서 다른 식구들과 시간을 섞는다. 돌보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도 나누고 자기 리서치가 옳다고 고집도 피운다. 위 오빠와 아래 동생과도 공통 관심사가 생겼다.

행복은 사회적 혹은 물질적 성공만으로 가늠할 수 없는, 마음 깊은 문제라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닫는 나이가 되었다. 부모 입장에서 자식에게 뒷바라지를 남들만큼 못해줄 망정 행복에 관한 나의 경험을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나누어 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한국어 능력이 80%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에게 부모의 가치관과 신념을 소통하고 물려주는 것은 여간 복잡한 일이 아니다. 그저 나의 일상 행위들이 어떤 향기가 되어 아이들이 나중이라도 그 냄새를 추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래왔었지만 요즘같이 길 잃은 마음으로는 그것마저도 신통치 않다. 그저 무색무취의 나날이 이어질 뿐이다.

둘째와 단둘이 차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너는 아빠나 엄마, 혹은 ‘또순이’를 보면 마음 속에 따뜻한 뭔가가 차오르지 않니? 어떻게 그런 것이 생기는 걸까? “두뇌 작용이 아닐까요?” 그런데 살다 보면 커다란 기쁨이나 깊은 슬픔을 경험하는 때가 온단다. 그 때는 이런 마음의 감정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이 느낀단다. 마치 ‘사랑’이 내 피부 밖에, 상대방과 나 사이 공기 중에 객관적인 사물처럼 있는 것 같고 내 마음은 단지 거기에 참여하고 있을 뿐인 것 같은 생각. 여자들의 경우에는 아이를 낳고 품에 안을 때 그런 것을 느낀다더구나. “흥미롭군요.” 아빠는 내가 8살 때 죽은 형을 생각할 때 가끔 그렇단다. 잠시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난데없이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바깥에는 비가 주체할 수 없이 내린다. 옆자리를 보니 둘째 아이가 흐느끼고 있다. 넌 왜 그러니? “모르겠어요. 아빠한테 전염됐나 봐요.” 언어장벽을 극복하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마음을 전달한 기분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늘은 아직 회색이다. 그렇지만 타오르는 커다란 기쁨, 짙은 슬픔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그저 먼산 희끄무리 어스름한 언저리마다 그를 남기고 돌아선다. 그리고 일상은 무덤덤하고 늘 ‘관계’에 목말라 있다. 행복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은 지금 내 옆의 행복이 너무도 크기 때문인 것일까? 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가 너무 커서일까? 그 큰 품 안에 그를 알지 못하고 죽은 나의 형과 그를 믿지 않는 둘째 아이의 자리가 넉넉히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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