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felix cul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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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이와 성당으로 단둘이 차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아빠는 미사 중에 무슨 생각을 해요?” 하고 묻는다. 뜨끔하였다. 미사 중에 뜨듯한 감동이 온 몸으로 퍼져가는 경험을 한 게 언제적 일이었던가? 어스름한 빛 속에 먼지들이 떠돌듯, 대부분은 주로 상념에 떠돌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사람들과 단편적으로 나누는 인사가 어색하기도 하고, 북적대는 곳에 섬처럼 고립되는 느낌이 불편해서 가급적이면 빨리 벗어나려고 서두르는 편이다. 가끔씩 있는 이벤트들도 성정에 맞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꾸 미사를 찾아 앉아있는 것일까?

아이에게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 가는 것보다는 굼벵이 같아도 바른 길에 머무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다른 방향들이 다 엉뚱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요?” 글쎄. 다른 모든 방향으로 다 가보지도 않고 나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가 떠올라서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주인공 애벌레가 다른 애벌레를 밟고 기둥을 타고 애써 구름 위로 올라가도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듯이, 나도 어쩌다가 그걸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둘째 아이는 제목을 기억했다가 몇 시간 뒤에 인터넷에서 영어로 된 글을 찾더니 금방 읽었다.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별 감흥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남들 다 올라가는 기둥을 외면하는 것은 일종의 도피일까? 어쩌면 내가 가지 않는 길들을 ‘엉뚱한 길’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눈에는 설사 부질없는 길로 보이더라도 그런 경험을 통해서만 결국 바른 길을 알아볼 수 있다면 세상에 의미 없는 길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젊은이들에게는 넓은 경험이 결국에는 많은 경우에 약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원죄라는 샛길로 빠진 사건조차 ‘O felix culpa (Oh happy fault)’라고 표현하였다. 비록 불행한 일이 생겼지만 그것을 통해서 더 좋은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원죄’ 사건을 두고 매년 부활을 기념하는 밤에 ‘오 복된 죄여’라고 찬송하는 전통이 있다.

에덴 동산에서 벌어진 스캔들을 읽다 보면 아담에게는 샛길로 빠질 수밖에 없었던 좀 실망스러운 면모를 접하게 된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아담은 신화적인 인물로 여겨지기도 하고, 진화론적으로 보면 한 사람이기 보다는 ‘인류’라는 집단적 개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견해로서는 ‘인격적인 한 사람’, 어쩌면 인류 모두의 조상인 최초의 인간이다. 우리 모두의 면모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견해가 더 사실적인 것 같다. 그는 겁쟁이였던 것이다.

아담은 에덴 동산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그곳이 영적인 장소(파라다이스)였는지, 아니면 지구 어딘가에 실재한 성역이었는지, 아니면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곳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아담은 그곳에서 관리자요 군인이요 노동자였다. ‘모든 것에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관리감독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돌보았다’는 것은 (원어로는) 그곳을 지켰다(keep)는 것을 의미하며, ‘일구었다’는 것은 노동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뱀을 앞에 두고서는 겁쟁이가 되었다. 아내가 뱀에게 유혹을 당할 때 그는 들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 내내 이브 옆에서 모든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브가 열매를 먹고 나서 ‘자기와 함께 있던 남편에게도 주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아담은 동산과 아내를 지킬 의무가 있었음에도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뱀의 모습이 아주 흉측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뱀이 ‘땅을 기어다닐 것이다’라는 벌을 받았다는 것은 그 전에는 기어다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고 또 요한 묵시록에 보면 괴물인 ‘용(dragon)’ 과 같은 존재였다고 지목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외모도 무척 사나운 모습이 아니었겠는가. 이브는 아이처럼 겁이 없었고 아담은 그 뒤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지 않았을까?

그 때 아담은 죽을 각오로 아내와 에덴을 지켰어야 했다. 그것이 순리였고 그의 운명이었고 결국 죽지 않을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먼 훗날에 창조주 스스로가 ‘사랑은 이런 것이다’ 하고 시범을 보인 것이다……라고 나는 소설을 써본다.

아담은 애초에 흙 혹은 먼지(dust)였지만 신의 이미지와 합해져서 사람이 되었다. 사건 이후 모든 것이 일그러져, 아담은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라’는 운명이 되었고, 뱀은 ‘평생 땅을 기어 다니며 그 먼지를 먹고 살게’ 되었다. 호러 영화가 무시무시한 암시로 끝나는 것처럼 오싹한 결말이다.

인간이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 애초에 에덴으로 뱀이 숨어들어올 때 왜 이것이 용인되었을까?  설사 인간이 약해서 유혹에 넘어갔다고 치자. 그런데 왜 창조주는 바로 즉시 구하러 나서지 않고 굳이 그토록 오랫동안 우여곡절을 겪도록 뜸을 들였을까? 아직도 세상은 뱀이 사람 몸을 먹고 사는 것 같은데 ‘Oh happy fault’라고 한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일까? 똑 부러지는 해답 없이 오늘도 미사에서 그저 상념에 잠겨있다.

사람이 실족을 하는 데는 ‘두려움’이 가장 큰 역할을 하나보다. 세상이 왜 이다지도 먼 길을 돌아가는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노동과 산고라는 훈육을 겪으면서 좀 덜 두려워하면서 살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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