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꾸었던 꿈이 기억나지 않는다. 마음이 이렇게 어수선한 것을 보니 그리 행복한 내용은 아니었나 보다. 바쁘게 생활하는 사이사이, 또는 일에 몰두하다가 숨을 돌리는 잠깐 동안, 혹은 생각 없이 집안 일이나 운전을 하다가 문득 멍하니 어떤 기분에 젖을 때가 있다. 그런 빈틈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루하루를 아무리 빼곡하게 스케줄로 채우더라도 피할 수 없는 순간들이다. 마치 징검다리처럼 단단한 돌들만 밟다가 문득 그 사이로 개울물이 흐르는 것을 의식하듯, 잠시 방심하는 순간에 일상의 빈틈으로 무언가가 스물스물 올라온다. 생각도 기억도 아닌, 그저 어떤 ‘기분’이나 ‘느낌’이다. 내가 계획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고 원인도 모르고 통제하지도 못하는 데도, 마음이 어떤 맛과 냄새에 젖는다. 마치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그 느낌만은 남아 있는 것과 같다. 형체가 없고 그저 색깔만 있는 이것이 우울일 수도, 울화일 수도, 고독일 수도, 두려움일 수도, 불안일 수도, 혼돈일 수도 있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어떤 기쁨이나 행복감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나만 알고 남들이 모르는, 삶의 색깔이 된다.
한때 잠시 이 개울물의 색깔이 화사한 것을 느끼고는 무척 행복했었는데, 오늘 잠에서 깨자마자 마음에 남아있는 이 텁텁함을 보니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갔나 보다. 사람의 마음은 역시 종잡을 수가 없다. 다른 모든 과학들은 현미경이나 망원경 같은 도구를 사용해서 연구하지만 인문학은 이와달리 자기 자신이 도구가 되는 학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러운 망원경으로는 밤하늘의 별을 보기가 힘들듯이, 내 마음이 어두우면 나에 관한 진실을 알기 힘들다고 한다. 내가 돼지우리에서 뒹굴수록 나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기 힘들어진다. 지금 내 마음의 집은 어둡고 먼지투성인 것 같다.
이번 겨울 들어 몇 주 동안이나 집에 환기를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오늘 아침에는 춥지만 창문들을 활짝 열고 진공청소기를 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잠깐 다른 일을 하는 동안 그냥 창문만 잠시 열어두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아이들이 방학이라 점심으로 찌개라도 끓여놓고 나가야겠다 싶어 준비하다 보니, 어제의 냄비가 아직 씽크에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닦아서 오븐에 올려 놓았더니 이번에는 뚜껑이 양념 묻은 채 밤새 말라서 저쪽에 덩그러니 뒤집어져 있다. 더럽기야 하겠나 싶어서 씻지 않고 그냥 사용했다. 강아지 산책을 갔다 오니 오늘은 눈이 많아 놈의 발이 더럽지 않다. 발 씻기는 것도 패스다. 간밤에 눈 치우는 차가 골목을 지나갔는지, 차고 길 앞에 눈으로 담이 하나 들어섰다. 삽으로 담을 뚫다가 문득 혼자 사는 노약자들은 이런 경우에 허리 다치기 십상이겠다 싶었는데, 잠시 머리 속으로 몇 사람의 얼굴이 지나갔다. 그냥 생각을 접고 얼른 집으로 들어왔다. 멀찍이 어떤 이웃집 아저씨가 자기 옆집 할아버지의 차고 길을 같이 치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언젠가 폭설이 내린 겨울 밤에 자정을 넘겨 집에 오다가 집 앞에서 차가 눈에 처박힌 적이 있었다. 그 때 저 이웃집 아저씨가 잠옷으로 아들과 함께 자기 트럭으로 나를 구출해준 일이 있다.
어제는 크리스마스였다. 성당에는 여러 이벤트가 있었고 가족 모두 축제 분위기를 즐겼었다. 그러나 잠들고 다시 일어난 오늘 아침, 여전히 세상은 어제처럼 눈으로 덮여있지만 하루를 시작하는 일상의 틈 사이로 문득 젖어드는 이 기분은 전혀 ‘기쁨’과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누군가, 12월 들어 왠지 계속 우울했었는데 그 원인이 스스로 교만하고 겸손하지 못한 탓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즐거워졌다고 했다. 교만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뿌리 뽑힐만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원인을 알았다니 축하할 일이기는 하다.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어떤 마음의 독소가 먼지처럼 마음이라는 어두운 집 안에서 돌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창문만 열어놓지 말고 열심히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할 때 냄비만 씻지 말고 뚜껑도 같이 깨끗이 씻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나면 발을 꼬박꼬박 씻겨주고, 생각나는 노약자 집에 들러 눈도 좀 치워주고, 이웃집 아저씨에게 전에 눈에서 꺼내 줘서 고맙다고 말하면서 가끔 그가 일을 도와주면 … 그러면 나 자신이라는 ‘도구’가 좀 깨끗해져서, 간간히나마 개울물이 다시 기쁘고 평화로운 색깔로 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