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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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Lewis의 “Mere Christianity” 중에서 일부를 번역하여 편집하였습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이병헌) 말해봐요, 저한테 도대체 왜 그랬어요?’ ‘(김영철)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하는, 영화의 명대사가 떠올랐습니다. 인생에서 격하고 서글픈 드라마들의 뿌리에는 늘 ‘이런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덕목 중에 크리스트교에서는 첨예하게 관점을 달리하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점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덕목’이라고는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이 점을 발견하면 아주 싫어한다. 절대 관대하지 않다. 반면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점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이 거의 없다. 자신에게 이 점이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조차 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 죄의식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 점이 보이는 사람 곁에는 친구가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이 점이 나에게 많을수록, 다른 사람에게서 이 점이 보았을 때 더 싫어한다. 이것은 바로 ‘pride, 자존심, 자부심, 자긍심’이다. 그리고 이와 정반대 되는 덕목이 ‘humility, 겸손, 순종’이다. 프라이드는 크리스트교 세계에서 가장 큰 악덕(vice)으로 불린다. 다른 것들은 여기에 비하면 모기에게 물린 정도에 불과하다. 프라이드를 통해 악마는 악마가 된다. 그리고, 프라이드는 다른 모든 악덕을 끌어들인다.

내 프라이드가 강할수록 다른 사람의 프라이드를 미워하게 마련이다. 내 프라이드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보는 가장 쉬운 질문이 있다. 즉,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거나,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내가 말할 때 누가 끼어들거나, 훈수를 두거나, 가르치려고 하거나, 누가 뭔가를 자랑할 때 과연 나는 얼마만큼 기분 나쁜가?’

프라이드는 다른 사람의 프라이드와 반드시 경쟁한다. 꾼은 꾼을 알아본다. 같은 업종끼리는 절대 화목할 수 없다. 프라이드는 뼛속 깊이,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다.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은 단순히 뭔가를 가졌거나 뭐가 많다는 이유로 즐거운 것이 아니다. ‘옆에 있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아야 기쁜 것이다. 단순히, 돈이 많아서, 학벌이 좋아서, 예뻐서 프라이드가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돈이 많아서, ‘더’ 학벌이 좋아서, ‘더’ 예쁘게 생겨서 프라이드가 생기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이 부자이고, 모두 영리하고, 모두 잘생겼다면 자랑스러울 것이 없다. 비교나 경쟁이 없다면 프라이드도 사라져버린다.

다른 악덕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지 않다. 경쟁적이라면 우연이다. 성적 욕망은 한 여자를 두고 우연히 경쟁할 수도 있지만, 각자 다른 여자가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은 굳이 그 여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자를 뺏는다. 음식도 충분하지 않으면 서로 경쟁하게 되겠지만, 프라이드는 가진 것이 많아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도 자신의 ‘힘’을 자랑하려고 더 가지려고 한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물론 돈을 원한다. 더 좋은 집, 더 많은 휴가, 더 좋은 음식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단지 탐욕스럽기만 하다면 더 가졌다 해서 더 쾌락이 오는 것은 아니다. 일년에 백만불이면 모든 사치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더 부자가 되려는 이유는 ‘어떤 사람보다 더’ 부자이고 싶기 때문이다. 프라이드는 ‘힘’을 즐기는 것이다. 내게 프라이드가 많다면,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부자거나 더 영리하거나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옆에 단 한 사람 존재한다 해도 그는 내 라이벌, 원수가 된다.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은 ‘프라이드’였다. 다른 악덕에는 친구가 있지만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에게는 친구가 없다. 주정뱅이, 방탕한 사람들, 허영이 쎈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어울려 다니는 경우가 있지만, 프라이드는 ‘그 자체’가 서로간의 적의, 증오를 동반한다.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은 ‘신’을 알 수 없다. 그는 아래로만 바라보고, ‘무엇’ 아니면 ‘누군가’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래를 보기만 하면 위에 있는 뭔가를 볼 수가 없다. 설사 그가 종교적으로 보이더라도 그는 상상의 신을 ‘이론적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자기가 보통사람들보다 더 낫다는 것을 신도 인정한다고 상상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켰더라도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아마 이런 경우를 두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모두가 이런 덫에 걸릴 수 있다.

프라이드에 대한 좋은 테스트, 리트머스 시험지가 있다. 스스로 ‘신앙생활 덕분에 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거나, 특히 ‘어떤 사람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분명히 하느님보다는 악마의 덫에 걸린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하는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해서 아예 잊어버리거나, 자기자신을 아주 미소한 존재, 결함 많은 존재로 이해한다.

좀 덜 심각한 다른 악덕들의 경우에, 악마는 우리의 동물적인 본능에 속삭인다. 그러나 프라이드는 육신을 거치지 않고 우리 영혼에 ‘직접적으로’ 들어온다. 완전하고 순수하게 ‘영적인’ 악덕이다. 그래서 더더욱 미묘하고 은밀하며 그런 까닭에 아주 치명적이다. 때로는 좀 덜 나쁜 악덕을 절제하는 데에 프라이드가 사용되기도 한다. 선생님들은 때로 아이들을 다룰 때 애들의 프라이드를 건드려서 점잖게 행동하거나 탐욕을 죽이거나 용기를 내도록 유도한다. 이때 악마는 웃는다. 교만을 손에 쥐는 한, 악마는 우리가 순결하거나 허영을 줄이거나 용감하거나 절제 잘하는 사람이 되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암을 줄 수 있다면 동상 정도는 치료되도록 허락한다.

진짜 겸손한 사람을 만난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겉모습이 검소하거나 말을 온유하게 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대신 ‘아주 명랑해 보인다’, ‘현명하다’, ‘내가 말하는 것에 진짜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라는 인상을 우리는 받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너무 쉽게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에 질투가 날 수도 있다. 그는 겸손에 대해서 생각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자신에 대해서 잊어버린다.

정말로 겸손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조언 한마디. 첫번째 관문은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big step’이다. 그만큼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내가 자만하는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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