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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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으로 스쳐 가는 바람에 봄 내음이 스며있고 등에 비춰오는 햇살의 감촉이 따스하다. 해도 점점 길어져서 이른 아침인데도 이웃집 지붕에 아침 해가 밝다.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 겨울을 생각하면, 과거시험에서 돌아오는 서방님을 버선발로 맞이하는 새색시처럼 반가움이 앞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눈이 녹으니 잔디밭 언저리에 지난 겨울 눈 치우던 트랙터가 할퀴고 간 상처가 흉하고 깊게 드러났다. 절로 한숨이다. 그래도 잔디 파편을 제자리에 놓아주고 흙을 덮어 잘 다독여 주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새 잔디로 다시 덮이게 될 것을 생각하니 안심이 된다. 대지에 가득 찬 생명의 기운이 상처를 금방 치유해 줄 것이다. 땅에 숨어있는 생명력은 놀랍기만 하다. ‘토지’의 박경리 여사는 사위 김지하 시인에게 ‘채소도 길러보지 않고 무슨 시를 쓰느냐’고 타박했다고 하는데, 과연 사람이 자연을 대할 때 마음은 겸허해질 수밖에 없나 보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밤에 잠을 자는 사이에 어느새 싹이 트고 줄기가 자란다. 사람이 잠시 돕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생명을 만들고 자라게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이다지도 거대하고 놀라운 계절 속에 내가 속해 있다니 영광스러운 마음이다.

어렸을 때의 1년이라는 시간은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까마득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계절은 팽이처럼 어지럽도록 빨리 돌아간다. 안구에 지난 봄날 나뭇가지에서 싹을 틔우던 연두 빛 잎새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 그 똑 같은 가지에 다시 새로운 잎이 돋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인생은 한 번의 날숨과 함께 나오는 하얀 입김과 같다고 했던가. 아침에 피었다가 점심에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버리고 마는 풀과 같다고도 했다. 서울에서 생활할 때는 도무지 돌아볼 수 없던 것들을 여기서는 보고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기 전에 좀 일찍 이런 것을 깨닫게 되니, 이것이 과연 다행인지 불행인지를 모르겠다.

하늘과 땅에 숨어 있으면서 모든 것을 치유하는 이 신비한 생명력이, 설사 내가 사라지더라도 계속 남아 활동할 것이라 생각하니, 어쩌면 그 힘에 힘입어 내 생명도 이 세상에서가 아니면 저 세상에서라도 어떻게든 치유되어서 연장되고야 말 것 아닌가 하는 희망이 생긴다. 욕망이라면 욕망일 것이다. 사실, ‘길러진 욕망(차를 갖고 싶다 등)’ 이외에 타고난 욕망들은 모두가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욕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먹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은 음식이 있기 때문이고, 성적으로 갈증을 느낀다는 것은 섹스가 있기 때문이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갈망한다는 것은 또 실제로 그런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삶을 갈망 한다는 것은 아마도 영원한 생명이 실재로 존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지금 우리의 존재방식에서 우리가 굳이 물질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개체로 혹은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어쩌면 단지 ‘스쳐가는 과정’이 아니라 무슨 영원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마치 물방울이 바다에 떨어져 흡수되듯이 거대한 자연이나 우주에 흡수된다고 한다. 몸도 사라지고 자아도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 나의 몸이나 자아 의식은 마치 환상이나 꿈처럼 가짜이거나 감옥인 것이다. 거기에 머물수록 낭비이다. 그런데, 자연에 무슨 낭비라는 것이 있겠는가! 몸과 개인의식은 소중한 의미가 있으리라고 본다.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억울한 죽음을 맞아서도 평온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남이 자기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이다. 몸이라는 것은 참이 아니고 영혼이야말로 참 자아이기 때문에, 자기 영혼이 해를 입는 것은 스스로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나 부도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악한 사람들한테서 당하는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고 한다. 언뜻 숭고하고 존경스러운 태도라고 할만하지만 한편으로 뭔가 현실적인 것 같지 않다. 몸이 느끼는 고통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몸과 영혼은 마치 ‘책’과 그 책이 가진 ‘의미’의 관계처럼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문자가 바뀌면 그 의미가 달라지고 그 의미를 바꾸려면 문자를 바꿔야 한다. 우리 각자는 누군가가 써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페이지가 찢어지는 경우에는 분명히 그 의미가 혼란스러워지듯이, 몸이 손상되면 분명 보이지 않는 영혼에도 왜곡이 일어난다. 그렇게 깨진 그릇은 다시 붙여봐도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잔디밭을 치유하는 것은 어디에서 온지 모르는, 대지 속에 숨은 거대한 생명력이고, 찢어진 잔디덩어리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흙을 덮어주는 누군가의 수고로움도 필요하듯이, 우리의 몸과 영혼이 치유되려면 우리 밖에서 오는 영원한 생명력과, 누군가로부터 수고로운 도움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생명이 느껴지는 계절에 벌써 생명의 손상을 걱정스러워 하다니 너무 촌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햇살 가득한 오늘, 그저 하루 먹을 것이 있고, 당장 입을 것이 있고, 오늘 밤 잘 곳이 있고, 홀로 고통 받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생각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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