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느님)이 선하다면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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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 Mike Schmitz

몇 년 전에 제 친구의 지인에게 참으로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 테이블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뒤에 있는 가방에서 기저귀를 빼려고 잠깐 돌아서는 그 짧은 순간에 아기가 테이블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아기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와 비슷한 일로, 혹은 더 끔찍한 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한 친구에게 우리는 위로하려는 뜻으로 “아마 하느님의 뜻이겠지” “우리가 모르는 뭔가 계획이 있으신 거겠지”하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계획한 일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식으로 위로하면 안됩니다.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하느님이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모든 일을 빈틈없이 조정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합니다.

분명히 하느님은 모든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만한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인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므로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모두 통제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그리스도교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은 좀 다릅니다. 그분은 모든 창조물에 독립하여 존재하면서도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밖에 독립적으로 뭔가를 창조하는 순간, 자신이 가진 힘을 일정 부분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피조물에 넘겨주게 됩니다. 다시 말해, 물리학이나 열역학상의 원리라든가 원이나 사각형의 원리를 자연 안에 창조했을 때에는 어떤 통제의 힘을 넘겨주게 되어, ‘둥근 사각형’이라든가 ‘사각의 원’ 등은 아예 하느님조차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이런 의미에서 일정 부분 통제력이 피조물의 자체에게 넘어가는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존재를 당신과 독립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을 때 사람 안에는 하느님이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기게 됩니다. ‘자유로우면서도 자유롭지 않은 인간’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천사의 자유마저 하느님께서는 전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십니다’. 다만 우리나 천사는 하느님의 권위와 뜻에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 내어놓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러지는 않습니다. ‘자유의지’라는 인간존재의 태생적 원리에 따라 우리는 자유롭게 하느님의 권위에 저항하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우야든동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께요. 내 삶에 관여하지 마세요.’ 하게 됩니다. 그러다, 특히 비극적이고 마음이 무너지는 상황, 폭력과 전쟁에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왜 이런 상황을 만드셨나요? 제발 인간에게서 자유를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내 아이를, 내 부모를 돌려주십시오”하고 부르짖습니다. “제발 모든 상황을 통제해 주시고, 오직 당신의 선한 뜻만을 이루십시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원했고 그렇게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우주와 인간은 이렇게 창조된 각자의 원리, 하느님조차 침해할 수 없는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죽음’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구약의 ‘지혜서’에서는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도, 생명의 파괴를 기뻐하지도 않으신다’하고 말합니다. 어떤 아기가 죽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획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은 시계를 만든 장인처럼 세상을 관망하고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매순간마다 친밀하고 깊이 관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역시 ‘참새 한마리도 하느님 모르게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분명 하느님은 우리를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의 죽음이 하느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느님에게는 ‘완벽한’ 의지가 있는데 이것은 무언가가 꼭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선함, 생명, 사랑, 이성, 지혜, 진실, 기쁨, 아름다움 등 모든 좋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직접적으로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나쁜 일이 생겼다면 이것은 하느님의 ‘완벽한’ 의지가 아니라, ‘허용하는’ 의지입니다. 아이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하느님이 이를 원했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플랜 A가 아닙니다. 원하지는 않지만 허용합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독재자나 폭군으로서 군림하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자유도 가져가고 물리법칙도 잠깐 정지하면 안됩니까? 뭔가 조치를 좀 취하지 그러십니까” 하고 외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원리와 우리의 자유를 범하지 않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아주 잠깐만이라도 ‘안전과 보호’라는 명목으로 우리의 자유를 차단하는 것보다 우리가 항상 자유를 보전하는 것이 결국 더 커다란 선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선하시니 분명히 그럴 것이라 ‘신뢰’합니다. 둘째, 극도로 비극적인 중에도 하느님은 더 위대한 선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완벽한’ 의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죽음은 그저 ‘허용된’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로 자신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더 큰 선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면 사실 이보다 더 비극적인 테러는 역사에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큰 복을 가져왔습니다. 모두가 구원된 것입니다.

자유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보다 자유 자체가 더 큰 선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가장 큰 비극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을 이끌어내십니다. 그렇다고 아무 악이나 우후죽순 일어나도록 방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악을 원하지 않습니다. 설사 발생하더라도 하느님의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공격 당하거나, 범해지거나, 죽는 것을 하느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하느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비극을 다시 생명으로 돌려놓습니다. 하느님은 죽음마저 생명으로 다시 바꾸실 수 있습니다. 더 큰 선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장의 상처, 사고, 고통, 질병, 심지어 죽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완벽한’ 의지는 더 큰 선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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