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바디스(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살아 숨쉬는 우리 모두는 여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죽음 뒤의 행선지를 아무도 모른다. 이대로는 삶의 ‘안정’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환상을 거부하는 자는 결국 묻게 된다. 쿼바디스?
만약 천국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지금 현재의 모든 신앙은 가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친 예수는 사기꾼인 셈이 된다. 그러나 만약 천국이 그 답이라면,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하나도 없다. 사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천국을 위한 자궁에 불과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류 신학자들’조차 ‘땅을 바라보라’고 하고, 강론대에서는 천국에 대해서 입을 다문다. 천국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현실도피로 치부된다. 신학자들은 현대 사상의 꼬리를 쫓아 가느라 바쁘다. 그들의 눈은 하늘이 아니라 진흙에 박혀있다. 창립자가 분명히 가르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의 것을 넘어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지상의 종교(우파에게는 번영과 성공을 가져다 주는 기복의 교회, 좌파에게는 정치적 혁명을 가져올 해방신학의 교회)로 바꾸어 간다.
그러나 가짜(번영과 정치)가 주는 만족은 오래가지 못한다. 번영이란 지루한 법이다. 스웨덴의 자살율은 하이티 섬보다 천배나 더 높다. 혁명도 결국에는 지루해진다. 혁명은 그 성공 자체를 넘어서지 못한다. 모든 혁명은 새로운 폭정의 순환을 부른다.
인간의 거대하고도 비극적 진실이 있다. 그 가슴에는 천국의 크기만한 구멍이 있어서 아무것도 거기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그랜드 캐년에 자갈을 채우려고 발버둥치면서 세월을 보낸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 쉬기까지 찹찹하지(차분하지게 가라앉지) 않나이다’. 이 문장이야말로 우리의 운명과 행복과 불행의 비밀을 담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인기가 없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우리가 평소 행복을 위해 숭배하고 있는 것들을 한없이 작게 만든다. 사람들은 자신이 숭배하던 것이 가짜고 환상이라고 하면 혐오하고 진실을 말하는 자를 싫어한다. 대대로 예언자들의 운명이 그러했다.
그러나 사실 천국을 믿지 않는 자들조차 속으로는 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 심장은 자연스럽게 천국을 향한다. 죄악이라는 반 중력이 반대로 잡아당길 때조차 심장이 가진 중력은 자연스럽게 천국을 향한다. 어거스틴은 “내가 가진 사랑이 내 존재의 무게이다.”라고 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을 때조차도 삶이 이상하리만치 불만족스럽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심장이 신비스럽게 반응한다. 특히,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을 때 그렇다.
푹신푹신한 구름과 자웅동체 같은 아기 천사 같은 것은 아무도 동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천국만은 모두가 막연하게 동경한다. 아무도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해본 그 어떤 천국의 모습도 동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눈도 본적이 없고 어떤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어떤 사람의 상상해 본 적 없는,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신이 스스로 마련한 뭔가”는 모두가 동경한다.
우리 모두는 어린이들이다. 성인이란 없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다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바꿀 뿐이다. 야구방망이 대신에 비즈니스를, 눈썰매 대신에 섹스를, 장난감 총 대신에 권력으로 바꾼다. 죽음이 다가오면 신은 부른다. “아기야 오렴. 장난감을 이제 내려 놓고 집으로 올 때가 되었단다.” 놀다가 돌아가야 할 집 –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극히 자연스럽다. 천국을 향해 우리는 설계되었다. 지상의 것에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도피이다.
천국을 생각하는 것은 현실도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반대이다. 성인들의 삶과 예수의 삶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천국을 진정 사랑하는 자야말로 지상의 일에 정열을 다한다. 고향을 사랑하는 자는 식민지를 최대한 고향 같은 곳으로 개척하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법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기를 산 채로 나으려는 산모는 태중의 아이를 지극히 돌보지만, 낙태를 마음 먹은 여자는 그렇지 않다. 어딘가 목적지로 가는 도로는 잘 정비되지만, 중간에 끊어진 도로는 관리하지 않는 법이다. 삶이 천국을 향한 여행길이라면 천국의 영광 일부가 거꾸로 그 길에 기대와 희망으로 반영된다. 그리고 세상은 신의 장엄함으로 채워지고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영원의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하수구에 흡수되어 사라질 뿐이라면, 현재의 생애는 그저 소용돌이 치는 흙탕물일 뿐이다. 아무리 편안하게 누워 보려고 그 속에서 용을 쓰고 꼼지락거리더라도 오직 헛되고 헛된 일이다.
천국에 관해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질문이 있다. 다른 모든 문제는 사소할 정도이다. 바로 “나 자신이 구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다. 죽음이라는 문을 통해 솔직하게 바라볼 때 나타나는 유일한 두 가지 옵션은 바로 무한한 기쁨을 누리느냐 아니면 무한한 우울에 빠지느냐이다. 그 기쁨을 누리려면 결정적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천국의 입장권은 무엇인가? 무엇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인가?
놀랍게도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중에서도 이 물음에 대해 올바른 답을 얘기하는 이들은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이는 교회의 종교 교육이 거의 재난 수준에 가깝게 실패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학생들은 “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지 않나요?” 혹은 “저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이를 수 있는지 신이 제시해 준 답은, 세상의 모든 중요한 답이 늘 그렇듯이, 어이없게도 간단하다. 그 한마디는 사도행전 16장 31절에 담겨있다.
<번역원본: http://www.peterkreeft.com/topics/heave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