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현실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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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 미친 장어’라고 불리는 가수 강산에의 곡 중에 ‘사막에서 똥 눠 봤나’라는 거시기한 노래가 있다. 여행 중에 화장실이 있을 리가 없는 사막에서 급한 신호가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인적 뜸한 모래 위에서 엉덩이를 까고 걱정을 해소하는 중에 느낀 그 ‘깜짝 놀란’ 심정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 곡을 지었다고 한다. 여행을 자주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 ‘깜짝 놀란’ 느낌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밖에는 짐작할 수 없지만, 어제 어떤 모임에서 록키산맥까지 차를 몰고 여행을 다녀 온 어느 시니어 부부의 소감과 일맥 상통할 것 같다. 그 분들은 곳곳에서 펼쳐지는 절경에 끊임없이 ‘아!’ 하며 입을 벌리는 통에 입가가 찢어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산맥을 지나는 동안 덩치 큰 트럭을 운전하면서도 그 트럭조차 마치 하나의 점처럼 느껴지더라는 남편의 경험을 전하는 분도 있었다. 경이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사람은 이렇듯 한없이 작아진다. 그러나 그렇게 작아짐으로써 역설적으로 커다란 자유를 느끼게 된다. 강산에는 같은 곡에서 ‘두꺼운 갑옷을 벗은 것처럼 마음이 수수깡처럼 비고, 몸에 숨어있던 날개가 활짝 열려 바람에 하늘로 날아오르네.’ 하고 노래했다. 먼저 작아져야만 커진다.

우리 세대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접해야 여행다운 여행이라고 느끼곤 한다. 문명 같은 인위적인 환경을 접해도 즐겁기는 하지만, 거기서 벗어나 웅장한 자연과 마주하는 것만큼 마음을 정화해 주는 것도 없다. 삶을 근본으로 다가가게 해서 바닥을 다진 다음 다시 살아갈 ‘장어’ 같은 활력을 얻게 된다. 자연은 나 자신의 왜소함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현실(reality)에 더 다가가게 하고 거기서 우리는 힘을 얻는다. 현실에 맞추어 사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고, 거기서 벗어나 비현실적 삶을 영위할수록 몸과 마음은 부작용으로 인해 상처가 생겨 깊어지고 급기야는 죽기도 전에 이미 죽음을 맛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큰 현실(reality)이 무엇인지 하루빨리 인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내 자녀의 세대는 도시 여행을 더 좋아한다.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캠핑이나 경치를 위한 여행은 더 이상 따라 나서지 않는다. 자연보다는 낯선 대도시의 풍물과 문화와 음식을 즐기고 체험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무리 록키 산맥과 호수가 장관이라도, 아무리 벤쿠버의 삼림이 울창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적어도 내 자녀들에게는) 그저 좀 더 나은 ‘공원’에 불과하다. 캐나다에서 자란 탓인지 이렇게 주어진 자연환경을 너무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대신, 요즘 세대는 도시 문화(게임을 포함해서)에서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즐긴다. 그런데 이들은 이상하게도 점점 활기와 자유를 잃어 간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임을 깨달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명에 중독되는 가운데 ‘불안’ ‘우울’ ‘공황’ ‘절망’에 더 익숙해져 간다.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진 웅장한 자연을 볼 때 신비스러운 감정을 체험한다. 우리가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맨하탄 꼭대기에서 거대한 빌딩 숲을 바라볼 때도 역시 우리는 감탄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만든 작품이기에 감탄을 할 망정 신비스러움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일구어 낸 빌딩숲마저도 따지고 보면 모두 그 출발은 ‘무(nothing)’에서 시작된다. 자연을 볼 때 ‘저것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고 쉽게 ‘무(nothing)’이라는 근원에 다가가지만, 빌딩과 아스팔트를 볼 때 우리는 그 존재의 시작을 ‘무’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은 현실(reality)로부터 한 커튼 가려져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일부러 노력해서 커튼 이면에 있는 현실(reality)을 보려고 하지 않고 편하게 주어진 것들을 감각적으로 즐기기만 한다면 우리 영혼은 현실에서 멀어져 길을 헤매고 그러다가 넘어지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묻지 않고 보이는 것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호접몽(나비가 꾸는 꿈)’에서 사는 것처럼 허망할 것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데 어째서 나는 지금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고 있을까?’ 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한 철학자가 있었다. 의자의 원재료가 나무이듯, 우리 존재의 원재료는 ‘무(nothing)’이다. 나무가 의자의 형체로 있더라도 늘 나무의 성질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도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늘 ‘무(nothing)’의 성질을 품고 있다. 언제든 어디서든 이유 없이 사라지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존재가 이어지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매초 매순간 순간과 그 순간의 사이에 쉬지 않고 끊임없이 그 존재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행복과 평화를 소망한다. 그 첩경은 현실(reality)로 돌아가서 거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다. 거기에서 벗어나 생활할수록 무리가 가고 부작용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유태인들에게 ‘죄’의 어원은 ‘과녁에서 벗어남’이다. 사람은 민법 형법에서 벗어난다고 반드시 영혼이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 들키지만 않고 피해갈 수 있다면 요즘은 오히려 감탄하고 그 ‘스킬’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존재의 현실’에서 벗어난다면 사람의 영혼은 반드시 상처를 입는다. 예를 들면, ‘자기 자신 밖에는 믿을 것이 없다’, ‘사랑이 밥 먹여주나’, ‘죽으면 먼지로 돌아갈 뿐이다’하는 사람은 당장 즐겁게 살지는 모르나 이미 자신도 모르는 암세포를 몸에 키우고 있는 셈이다.

대학에 간 큰 아이의 기숙사를 식구들이 모두 다시 찾았다. 필요한 옷가지와 물건들을 건네주고 점심을 같이 했다. 아이는 사귀는 여자와의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었다. 아직 상대에 대한 상상력이 더 많이 작용하고, 상대방보다는 사랑 자체를 사랑하는 초보적 단계, 내가 보기에는 도저히 현실적(?)이지 않는 연애였다. 그러나 어차피 삶은 직선으로 가지 않는다. 설사 이용당하고 조롱 당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이라는 유일한 삶의 현실을 배우는 길이라면 넘어지고 상처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 길에 들어서야 할 것이다. 더 큰 상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예방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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