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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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온다. 아직은 포근해서 길에 닿자마자 녹아버리지만 그래도 먼 발치 들판과 숲에는 눈이 제법 아름답게 덮여간다.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오는 길에 팀호튼에서 커피를 샀다. 잠시 차창 밖을 바라보며 따듯한 커피를 마신다. 바쁜 일상에서 김처럼 잠깐 따스하게 피어오르는 달콤한 순간이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는 위와 같은 나래이션으로 마무리 된다. 감독의 말에 의하면 이 선문답은 호남고속도로 어느 휴게소 화장실 벽에 적혀있던 낙서였다고 한다. 내용상 어느 스님이 남겨놓은 듯한데, 어딘지 몰래 그 짠한 마음이 전해 온다.

영화의 줄거리는, 폭력조직에서 팽을 당한 중간 보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후 몸담았던 조직을 박살내고 자신도 죽는다는 내용이다. 고리타분할 수도 있지만 스토리를 표현하는 스타일이 좋고 등장 인물들의 연기가 일품이며 인상적인 명대사들도 많아서 잔인한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남자들로부터 꽤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영화였다.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그 세계에서 주인공은 배신을 당한 후에 원한과 피의 보복과 급기야 죽음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계기는 단 한가지였다. 아주 짧은 순간, 보스의 여자를 감시하던 중에 그 여자가 연주하는 음악과 그 여인의 자태에서 처음으로 다른 세계에서 오는 달콤함을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여자를 죽여야만 했던 주인공은 순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몰래 살려주었다. 그에게 불현듯 다가온 그 달콤함, 주인공에게 그것은 죽음을 불러온 슬픈 꿈이었다.

영화가 그린 세상은 상당히 암울하다. 복수의 절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보스에게 따지듯이 묻는다. “나한테 도대체 왜 그랬어요?”. 보스는 답한다.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아끼던 부하를 느닷없이 제거해야 했던 이유, 그토록 충성했던 조직에 배신당하고 잔인한 복수의 길을 걸은 주인공의 분노, 결국 ‘자존심(Pride)’의 충돌은 폭력과 피를 부르고 만다.

영화의 도입부는 다음과 같은 나래이션으로 시작한다 (이 역시 화장실 벽의 낙서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분명히 우리의 마음 안에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이 들어있다. 심지어 눈 앞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가지마저 내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만큼 우리 마음은 물질적인 우주 만물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그 마음이 ‘달콤한 인생’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게 갈구하는 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슬퍼서 운다. 그러나, 그 갈구가 이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우리 마음의 기원(origin)이 바위나 물처럼 이 세상이 아니라 딴 세상에서 왔기 때문은 아닐까?

채워지지도 않는 그런 달콤함을 마음이 갈구하게끔 우리 실존이 그런 상황에 던져진 것이라면 이토록 기만적인 상황이 또 있을까? 이렇게 끝난다면, 그렇게 신이 창조했다면 정말 더럽고 치사하고 심술궂은 신이다. 이것은 울고 말 일이 아니라 분노해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세에서라도 그 달콤함은 끝내 채워질 것이라 믿어야만 한다.

감독은 아마도 세계는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일 뿐이라는 봄날의 희망에서 출발해서, 마음이 가져온 가을날의 배신과 복수와 폭력으로 끝맺으려 했던 것 같다. 여기서 달콤한 인생은 한낮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에서 시작해서 울음으로 끝낼지, 아니면 울음에서 시작해서 끝내 희망으로 마무리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는지도 모른다. 수학자 파스칼은 이런 상황을 ‘베팅(wager)’에 비유하기도 했다. 후자로 베팅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무한한 이익을 가져온다.

사실 우리가 가진 ‘지식’이란 모두 그런 베팅스러운(?) 판단이 누적된 결과이다. 스스로 확인하거나 알아낸 지식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가장 그럴듯한 말에 설득 당한 결과가 우리가 받아들인 소위 ‘지식’의 실체이다. 지구가 태양주위로 돈다는 것, 모든 것이 질량조차 없는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사실은 모든 사물 (심지어 바위 조차) 공간 속에 떠있다는 것 등 우리가 안다고 하는 수 많은 것들은 이를 전하는 사람의 권위를 내가 신뢰하고 받아들인 결과인 것이다. 믿음은 그래서 가장 ‘그럴듯한’ 것을 판단하여 골라내는 아주 이성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가 표현하는 ‘달콤한 인생’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있지도 않은 달콤한 인생을 우연히 잠깐 맛보았다가 부질없이 죽어가는 어떤 비극적인 인생을 (멋있게) 그렸다. 그러나 미학은 종종 진실을 가리곤 한다. 나는 꿈을 꾸되 깨어나서 우는 대신, 딴 세상에 있을 그 달콤한 인생에 베팅을 하였다. 막상 베팅을 하고 나니 지금의 쓰디쓴 인생은 그럭저럭 견딜 만해진다. 시간이 지나니 행복해지기까지 한다. 내 마음이 바람과 가지를 움직이나 보다. 커피의 따듯한 김은 금방 사라져버렸지만, 이런 행복은 좀 오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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