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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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밝아지는 시간이 빠르고 저녁 해는 더디게 지고 있다. 하늘과 땅에 햇볕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리라. 감각은 아직 추운 바람에 잠시 헷갈리더라도 대세는 역시 봄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럴 때는 감각보다는 이성이 미래를 예측하고 기대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된다.

감각과 이성은 인류의 마음에서 아주 오랫동안 절친으로 지내왔었다. 밖에 푸른 나무가 눈에 “보이면” 이성은 밖에 나무가 “있고” 색깔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즉시 동의해 주었다. 그러다가 근대화라는 것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성은 감각을 잘 믿지 않게 되었다. 감각이 때로 헛것을 보기도 하고 몸 상태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맛을 안겨다 주었기 때문에 지식의 든든한 토대가 되기에는 미흡하다고 생각했다. 오감이 “이 나무는 저기 존재하고 있구나”하고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아도 이성은 각각의 감각을 믿을 수 없으니 어쩌면 우리는 꿈 속에서 나무의 허상을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나같이 무지랭이 일반인은 ‘무슨 개소리야’하지만 놀랍게도 (동양에서는 장자, 서양에서는 흄 같은)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 일부가 겪은 정신적 혼란이기도 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우리가 뭔가를 안다면 어떻게 아는가”를 따져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흄은 우리의 일상이 어쩌면 악마가 걸어놓은 집단최면이 아니라고 누가 확실히 말할 수 있나 했다. 내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 그렇게 서양 사람들은 인식론이라는 먼 길을 돌고 돌아 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다. 일부 사람들은 요즘에도 이런 생각을 만지작거린다. 공전의 히트를 친 “매트릭스”라는 영화 내용도 그렇고, 민경훈과 김희철이 부른 “나비잠”이라는 노래 제목에서도 그런 냄새가 난다. 내 삶은 누군가 나보다 지능적인 존재가 짜 놓은 정교한 프로그램이 아닐까, 아니면 단지 나는 사람의 꿈을 꾸고 있는 나비가 아닐까하는 식이다.

밖을 나서면 나는 곧 봄이 올 것을 안다. 감각이 나에게 던져 준 것을 재료 삼아 이성적인 판단으로 알기도 하지만, 그냥 직관을 통해서도 알게 된다. 이것 저것 쓱 훑어보면 굳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지 않아도 불현듯 알게 되는 것이다. 그냥 뭔가 증명하지 않아도 아는 능력을 보통 “직관”이라고 하는 것 같다. 직관과 이성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상책이다. 직관이라는 친구는 틀릴 때가 많지만 이성 또한 알고보면 흠이 많은 친구이다.

수학문제를 풀다보면 공들이는 풀이과정에서 다른 모든 곳이 다 맞아도 단 한번의 기호 하나를 실수하면 보람도 없이 엉뚱한 답이 될 수가 있다. 치밀한 사람이 가진 위험이다. 편집증이나 결벽증이나 음모론에 빠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논리가 치말하고 머리가 영리한 사람들이다. 기호 하나 틀리지 않는 완벽한 논리회로를 위해 정신을 쏟아붓는다. 그러다 보니 특정분야를 제외하고는 다른 분야에서는 젬병이다. 직관이라는 친구는 이성이 “내 계산이 다 맞아”하고 똥고집을 피울 때 “왠지 모르지만 답은 틀려. 좀 넓게 봐라.”하고 뼈아픈 지적을 해준다.

정신병이나 음모론에 빠진 사람들의 생각은 희한하게 반박이 어렵고 나름 철저한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원(circle)처럼 이성적으로만 볼 때는 완벽한 회로를 갖추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원이 폐쇄되어 있고 크기도 좁살만해서 도무지 다른 세상의 존재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사람은 생각이 원처럼 완벽하지는 않지만 원이 아니라서 작은 회로에 갇혀있지 않기도 하다. 오히려 십자가 모양처럼 설사 모순과 역설로 충돌한다 해도 동서남북으로 무한하게 거침없이 영원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근대부터 지금까지 이성은 작은 원으로 쪼그라들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회로가 그렇듯이 이성은 엄청난 기술을 발전시켰지만 그 부작용으로 이성은 삶에서 간장종지 만한 작은 역할만 하게 되었다. 정신은 분별력, 사리판단, 지혜 등 통합과 균형에 능한 직관이라는 자식을 홀대하고 대신 “경험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고 실험실에서 검증”하는 데에 쓸모가 많은 이성이라는 자식만을 편애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성은 머리는 좋고 출세는 했지만 속좁고 이기적인 맏아들 같은 놈이 되었다.

정신세계를 구축하는 가장 기본적인 주춧돌은 우리가 자명하다고 부르는 “공리”에 대한 믿음이다. 모든 사고의 기본이 되는 모순률 같은 공리는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지만 모두가 믿고 받아들인다. 그 위에 모든 사상과 인류의 정신유산의 탑이 세워진다. 공리가 옳다는 것은 이성이 증명해주어서가 아니라 직관을 통해서 아는 것이다. 거대한 정신세계에서 이성이 차지하는 자리는 아주 겸손한 자리이다. 이제 몇백년 동안 했던 맏아들 노릇 그만하고 자기자리로 돌아갈 때도 되었다.

엄마는 산고 끝에 품에 안은 아이를 바라볼 때 굳이 논문을 쓰지 않아도 이 아이가 내 밖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냥 안다”고 한다. 어떤 이는 바하의 음악을 들을 때 이 세상은 환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신의 존재까지 “확신” 한다고 한다. 여자도 아니고 음악가도 아닌 나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경지이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나보다 선한 사람이고 그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굳이 내가 직접 체험하지 못했더라도 그들의 말을 따지지 말고 그냥 믿어버리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한다.

이전 같으면 머리는 좀 안좋아도 “참 좋은 사람”으로 칭송받던 사람이 이제는 미련하고 생활력 없는 호구로 조롱받을 때가 많다. 이성의 영역 밖에 있는 지혜나 선함이나 덕성 같은 것들은 상대주의에 매몰되어, “너는 그리 살아라. 나는 이리 살께. 다만, 서로 욕하지는 말자.”하는, 게으른 관용의 자세가 덕목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다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에서는 힘이 센 자의 말이 정의가 된다. 백주 대낮에 아무리 속이 훤히 드러나는 뻔뻔한 짓을 저질러도 힘이 있어 법으로 처벌되지만 않으면 승리한다. “Force be with you” 같이 힘을 숭상하는 대사가 ‘플렉스’해 보이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얼마 전에 머리 좋은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허무”와 “니힐리즘”을 이야기했다. 주관주의와 상대주의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현대 젊은이의 일상적 고뇌인 것 같아서 안타까왔다. 그가 고립을 벗어나서 진실한 사랑을 외부로부터 전해받음으로써 존재와 의미에 대해 “그냥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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