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허용된다

1434

“진실은 없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 아이들이 열광하는 어떤 컴퓨터게임 속 어느 비밀결사조직의 신조(creed)이다. 이 조직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암살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래서 게임의 이름도 ‘Assassin’s Creed, 암살자들의 신조’이다.

이 단체의 목표는 인간의 자유와 평화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치를 위해 조직의 위계질서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고 폭력과 살인이라는 수단을 허용한다. 생명의 존엄을 찬양하면서 자신들이 적으로 규정한 사람들의 생명을 가차없이 빼앗는다. 다른 집단이 가진 맹목적 신념의 위험성을 비판하지만 자신들도 맹목적 신조에 사로잡혀 있다. 진실은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이상은 진실하다고 믿는다. 요즘 인기 있는 마블이나 DC의 영웅들도 다들 이런 식이다.

‘모든 말은 거짓말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그럼 지 말은 참말인가? ‘모든 말은 거짓말이다’라면서 자신만은 진실하다고 믿어달라는 것인가? 우리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이나 히어로 영화에 빠져들면서 어쩌면 이 혼란스러운 가치관에 젖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임이나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진실은 없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상은 소크라테스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영혼에 끊임없이 침투해왔다. 니체가 주장한 ‘초인 사상’도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진지한 청춘이라면 한번쯤 ‘혹시 정말 그런게 아닐까?’라고 회의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런 생각은 강렬하게 사람의 마음을 현혹한다.

이 주제는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를 괴롭힌 문제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주제를 극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그는 ‘살인까지도?’라는 생각으로 상상실험을 한다. 그는 ‘죄와 벌’에서 정의로운 젊은이인 라스콜리니코프가 비열한 주인집 할머니를 살해하게 만들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불행하게 버려졌던 아들이 자라서 비열한 아버지를 살해하게 만들어서 이 주제를 드라마틱하게 부각시킨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내 이십대에 가장 큰 고민을 던져준 작품이다. 허름한 자취방에서 자신의 종교를 버린 어떤 선배 형과 술을 마시며 ‘진실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라며 감정싸움을 했던 것도 바로 이 소설이 시발점이었다. 그 형은 ‘진실은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야’라며 뭔가 그 이유를 설명했던 것 같은데 나는 잘 납득하지 못했다.

법과 관습을 지켜야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이기 때문이지 영원한 진실이기 때문은 아니다. 진실은 바뀌지 않지만 사회적 합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없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벌금을 내거나 감옥을 가거나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는 등의 불행한 결과는 오직 재수없게 들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 쓰레기 같은 저 하숙집 여주인을 없애는 것이 차라리 인류를 위하는 길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용기이고, 들키지 않으면 정당한 것이다. 이것이 ‘죄와 벌’의 주인공이었던 라스콜리니코프의 살해동기였다.

‘카라마조프 집안의 형제들’에서 위의 라스콜리니코프에 해당하는 인물은 둘째 형인 ‘이반’이다. 그는 이성적이고 냉소적인 인물로서, 아버지의 살인을 실제로 실행한 사람은 불우한 간질병환자였던 배다른 동생이었지만 그를 정신적으로 사주한 사람이 결국 자기였다는 것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인물이다. 그가 배다른 동생에게 끼친 정신적 영향이 바로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는 사상이었다.

진실이 없다면 강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 가진 생각이 사회를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그래서 니체는 정신적으로 힘있는 이들(초인들)이 권력을 가지고 강심장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다스리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초인에 근접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주인공 두명은 강심장이 아니었다. 막상 자신들의 신념이 현실화되고 난 다음에는 왠지모를 가책과 괴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진실을 그제서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지금와서 감히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음을 짐작해본다면 그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진실이 정말로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처럼 실제로 행위했을 때 떳떳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없고 오히려 이상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진실이 없다는 말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고로, 나의 삶이나 죽음과 상관없이 객관적이고 변하지 않는 진실이 저 어딘가에 존재하나 보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태도는 ‘너도 옳고 나도 옳다. 객관적 진실은 없고 상대적 진실만이 있다. 그러니, 우리 서로 싸우지 말고 각자 관용의 태도를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합시다.’ 정도가 아닌가 한다. 모두가 쪼개져서 소라고동들처럼 개인주의적인 틀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C.S.Lewis는 ‘니가 나처럼 똑깥이 당했다고 하면 그런말을 할 수 있겠니?’ ‘내가 먼저 왔잖아요. 비켜주세요.’ ‘내거도 좀 줬잖아. 니것도 좀 맛보게 해줘.’ ‘야, 약속했잖아. 지켜.’라는 말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것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서로가 인정하고 지켜야하는 ‘제3의 진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사회는 그야말로 혼돈의 모래더미에 불과할 것이다.

‘진실은 없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생각은 아마도 우리 욕망으로 비롯된 오염된 사상인 것 같다. 그런 세상에서는 스타워즈에서처럼 ‘Force be with you.’라는 인사가 가장 좋은 인사가 될 것이다. ‘힘’이 곧 ‘신’인 세계이다. 나는 권력으로 자신의 상대적 진실을 남에게 강요하는 ‘권력에의 의지’로 들끓는 세상이 아니라, 나의 삶과 죽음에 상관없이 공기 중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객관적 진실에 나 자신의 욕망을 조용히 길들이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다.

NO COMMEN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