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떨어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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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가로수 길은 누가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작고 노란 낙엽들로 가득하다. 나무들은 겸손하여 자기가 가진 아름다운 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차가운 겨울을 미리 준비한다. 이웃집 사이로 난 길들은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삽화 같다. 툴툴거리며 학교를 나섰던 막내마저 같이 손잡고 걷는 사이에 이내 기분이 밝아진다. 이맘때면 흐린 하늘마저 산뜻하고 그 아래로 오색 단풍의 향기는 온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추석이다. 요즘은 주위에서 알려주거나 한국에 있는 누이에게서 카톡 메세지라도 와야 추석이라는 것을 안다. 요즘은 유교를 믿는 세상도 아니고 해서 한국에서도 그냥 편하게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한다고들 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는 제사상을 준비할 때 ‘홍동백서’니 ‘좌포우혜’니 하며 정해진 대로 차리느라 애쓰곤 하셨다. 그리고 제사 지낼 때에는 꼭 조상님들이 와서 먹으니 제사음식은 늘 맛이 없다고 했다. 추석에는 차례는 아침에 지냈지만 보통 때의 제사는 늘 자정에 시작했고, 끝나면 어른들과 캄캄한 대문 밖에서 귀신들을 배웅하곤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을 무렵에 수확을 감사하는 관습은 어디서나 있어온 모양이다. 다만 유교문화에서는 귀신이 된 조상들에게 감사한 것이요, 유대교와 기독교는 유일신에게 감사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특히 18세기말에 천주교가 종교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는데, 이 때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냐 마느냐는 목숨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그 후로 100년 동안 제사 문제로 인해서 수많은 피가 조선 땅에 뿌려졌다. 그런데 막상 오늘날 천주교에서는 제사가 자유롭게 허용된다. 제사는 ‘추수감사’의 전통적 표현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여겨지게 되었고, 이제 제사상에 조상귀신이 온다는 것을 더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 전통에서 수확의 대표적 상징으로는 빵과 포도주가 있다. 수확의 일부인 빵과 포도주를 신에게 돌려 줌으로써 자기자신을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돌려줌이 마땅하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런데 막상 요즘 뉴스를 보면 이런 의미들이 너무 고리타분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13억년 전에 두 블랙홀이 합쳐져서 생긴 중력 파장을 실제로 확인한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받았다고 한다. 우주 생성의 신비가 점점 밝혀져 가고 있는 것이다. 100년 전에 아인슈타인이 벌써 이 사실을 주장했었는데 이제서야 증명이 되었다고 하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제사상 귀신이 그러하듯이, 신도 이제 우리 삶에서 그 입지가 점점 좁아져 가고 있고, ‘추수감사’라는 것 역시 이제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다. 감사할 대상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나 숫자가 예전 신의 자리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만약, 50억년 전에 광물이 혼합된 어떤 웅덩이에 번개가 쳐서 ‘우연히’ 유기물이 만들어지고 거기서부터 아무런 목적 없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오늘날의 우리가 있게 되었다면 도대체 사람의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환경에 따른 우연만 있을 뿐, 목적이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어찌저찌해서 진화해온 산물이라손 치더라도, 마음은 어째 조금도 진화해가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수천 년 전의 고민이 오늘날에 와서도 해결되지 않고 있고, 한편으로는 수천 년 전의 지혜가 오늘날에 와서는 지극히 현명한 해답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앞으로 수만 년이 지나도 사정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평화롭게 죽을 수 있기를 자주 기도한다. 그렇지만 진짜 바램은, 설사 고통 속에서 시간을 끌며 죽게 되더라도 좀 품위 있게 인생을 마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에 대한 지식이 이런 바램을 해결해 줄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과학지식이 뛰어나고 숫자에 밝더라도 종잡을 수 없는 진화의 끄트머리에서 느끼는 이 허무함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품위는 커녕 라스베가스에서 어떤 회계사가 저지른 광란의 발자취를 따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일지 모른다.

요즘은 뭐가 불안한지 수면 습관이 고약하게 들었다. 비몽사몽인 날이 몇 달째 되다 보니 몸이 쇠약해져 간다. 달게 잠을 잔 기억이 아득할 지경이다. 몸 상태를 따라가는지 마음은 마른 풀잎처럼 건조해진다. ‘방탄소년’도 아닌데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불타오른다. 불의의 화재 때문에 황당한 피해를 입는 쪽은 늘 가까이에 있는 아내 아니면 자녀들이다. 쇠약해지더라도 식구들한테 누가 되지 않도록 곱게 나이 먹어야 할 텐데 자꾸 까칠해져서 걱정이다. 육신이 고달프더라도 마음이 잔잔할 수는 없을까? 이러다가 말년이 되면 아내한테 단풍낙엽이 아니라 젖은 낙엽 대우를 받을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애정결핍이나 자격지심에 시달리며 살다가 나이가 들면 온통 건강에 매달리며 생활하고 그러다 어느 날 덜컥 죽음을 맞이한다. 나이 들어 저 세상으로 갈 때 그저 가지에서 낙엽이 떨어지듯 자연스럽게 가면 우리는 그것을 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참다운 삶의 의미를 간직한 채 마음도 그렇게 초연하게 갈 수 없다면 육신의 편안한 죽음은 생각처럼 그다지 큰 복은 아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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