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집에 머물다가 어느새 밤이 다가왔다. 커피를 사러 현관을 나섰다. 인적 드문 동네 어귀을 따라 차는 군데군데 전등으로 장식된 집들을 지난다. 큰 거리가 한산하다. 아직 8시도 되지 않았는데 자주 가던 커피집이 문을 닫았다. 참…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지… 아내의 부탁도 있고 해서 좀 멀리있는 다른 곳까지 가보았다. 조용한 가운데 얼핏 사람 모습이 안에서 어른거린다. 오늘밤까지 영업을 하다니 이 가게에서는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 그렇지만 덕분에 나는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도 고요하다.
크리스마스 이브… 예년같았으면 성당으로 향했겠지만 오늘은 집에 머물러야 했다. 어제 퇴근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감기와 몸살 기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내는 자신의 몸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멍한 눈을 하고 있는 나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연말까지의 모임 하나하나 불참을 알렸다.
왜 아프냐고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신 때문에 내 발이 묶였노라 원망하는 것은 의리도 철도 없는 반응이다. 그래도 서운한 마음을 자꾸 누르다 보니 잠깐 우울한 심정에 잠기게 된다. 그러나 미숙한 인격을 들키기 싫어서 차마 내색하지는 못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셈치고 마음을 다잡는다. 감정에는 점수를 매길 수 없지만 의지에는 매길 수 있으니 의지를 길들이는 편이 가치있을 것이다.
늘 분주하기만 했던 이맘때였건만 갑작스러운 공백이 찾아왔다. 익숙한 습관으로 무심결에 흘러오던 생활이 갑자기 가위로 싹둑 잘리듯 멈춰섰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와 같은 의식의 진공상태에 빠져들며, 마치 큰일이 일어난 것 같았는데도 의외로 막상 아무렇지 않게 하루가 다시 흘러가는 것을 보니 짐짓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문득, 나는 강의 저쪽에서 이쪽으로 떨어져 서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저쪽에서 이밤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사람들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저쪽에서는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를 날리며 이밤을 즐거워하고 있지만, 습관적인 언어와 상투적 습성이라는 거품을 걷어내면 그 인사말에 침전된 가치가 남아있을까 싶다. 이날이어서 즐겁다기보다는 즐길 거리가 있어서 즐거운 것은 아닐까. 어쩌면 기뻐하는 것이 오늘밤이라는 무대에서 취해야하는 가장 적절한 태도이기 때문에 기쁨이라는 화장과 즐거움이라는 복장을 차려입었을지도 모른다.
희곡이 있고 무대가 주어졌으며 조명이 나를 비추니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공연을 해왔다. 희곡에는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축제의 밤이니 즐거워하라’라는 지문이 적혀있다. 그러나, 오늘처럼 강제로 정전이 되어 공연이 갑자기 중단되고나면, 조명이 꺼진 무대를 내려와 텅빈 객석에 앉게 된다. 내 축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저 멀리 지평선 끝에서 내리치는 마른 번개들처럼 여전히 자신들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오늘 나는 캄캄한 객석에서 지난날의 내 역할들을 회상해본다. 나는 진정 그 연극을 사랑했던 것일까? 내가 맡은 역할의 의미를 과연 알고는 있었던 것일까? 사랑의 척도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가’이다. 나는 그 연극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그저 신념없는 대사들을 외우며, 누가 쓴 연극인지도 모른 채 나의 역할놀이에만 심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청춘기에는 그나마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붓고 산화한 영혼들이 많다. 내 경우에는 그럴 용기도 없없지만 역사에 대한 그런 믿음도 없었다. 정의라는 집의 기초공사가 되기에는 ‘역사’라는 이름은 토대로서 미흡해 보였다. 아무리 어떤 사상이나 철학에 대한 신념이 강할 때에도 그것에 무릎을 꿇고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지를 따져물었을 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마도 사상이나 철학은 그 자체가 인격체는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쌓은 나의 신념체계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인격체요 사람이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래야 사랑이 자연스럽다. 설사 무질서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그냥 자기 자식을 품에 안고 있을 때는 그런 복잡한 사상적 반문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주저없이 ‘그렇다’는 답이 나올 것이다.
오늘처럼 고요하고 한적한 밤에 한 아기가 마굿간에서 태어나 여물통에 놓여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아기가 전능한 하느님이라고, 세상의 모든 비리와 부정을 해소하고 모든 부당한 압제에서 자유를 가져다 줄 해결사로서의 운명을 지닌 아기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얼핏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물과 고통을 모두 없애고 인간사회에 결코 무너지지 않을 복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라면, 신은 수퍼맨처럼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기적적인 모습으로 모두의 조명을 받으며 화려하게 하늘에서 내려왔어야 한다. 최소한, 모든 분쟁과 갈등을 제압하고 세상을 통일할 수 있는 유능한 제국의 황제 모습으로 등장했어야 마땅하다. 그는 모든 것을 꿰뚫고 모든 주장들을 박살내고 모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지적인 성인의 모습이어야 했다. 이쩌면 이것이 즐거워하는 강 저쪽에서 모두가 기대하던 메시아일지도 모른다.
아기는 우는 것 말고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순간순간을 타인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돌보는 데에 조금이라도 소흘하면 병에 걸리거나 굶어죽고 마는, 촛불처럼 연약한 존재이다. 이런 아기가 어느 어두운 시골 변두리에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소리소문 없이 태어났다. 오직 당시 경제적 하층민이던 일용직 노동자들과 먼 곳의 몇몇 순례자들만이 알아보았다. 그날밤은 대부분의 인류에게는 어제도 오늘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밤이었다.
놀랍게도 ‘사상과 철학’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 못하는 찌질한 사람들이 이 아기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들은 이 아기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이념에는 감히 목숨을 걸지 못하던 이들도 아기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이 아기는 인격체요 사람이고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 아기는 ‘나의’ 아기여야 한다. 오늘날 습관처럼 ‘메리 크리스마스’를 주고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직 남의 아기이다.
오늘 밤, 스스로 인류의 밥이될 운명이라도 되려는 듯이 여물통으로 태어난 어느 별볼일 없는 아기를 경축하는 파티가 강 저쪽 여기저기에서 열리고 있다. 이 아기가 나의 아기가 될 수 있을까? 이 날의 축제, 그동안 참여해왔던 연극이 진정 나의 축제요 나의 무대가 될 수 있을까? 축제에 참여하지 않는 강 이쪽은 놀랍도록 아무렇지도 않고 전혀 불행한 느낌도 없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은 아직도 고요한 어둠에 묻혀있다. 전기가 다시 들어온다면, 띄엄띄엄 전등으로 장식된 저 집들처럼 내 집에도 전기세가 좀 들겠지만 그래도 전등을 좀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