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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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커피 생각이 났다. 어느새 앙상해진 가지들 위에 소담하게 눈으로 덮여 있는 나무들이 흐뭇하다. 섭씨 0도. 녹을듯 말듯 오후되면 곧 아스라이 사라질 하얀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며 운전하는 사이에 어느덧 익숙한 골목이요 금새 집앞이다. 요즘은 잠시라도 딴 생각에 잠기면 그 틈새를 비집고 망각의 마법 가루가 머리 위에 뿌려진다. 가루는 숱이 없는 머리카락 사이로 바이러스처럼 스며들어, 그렇지 않아도 느려진 뇌를 ‘레드썬’ 주문을 걸어 금새 마비시키고, 머리 안은 하얀 세상으로 변한다.

점점 다가오고 있는 개인적인 종말을 생활의 이런 작은 해프닝에서도 늘상 감지하게 되는 요즘이다. 확실한 것은 그것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이요, 아무도 모르는 것은 그것이 언제인가하는 것일 뿐이다…

망각 때문이건 게으름 때문이건, 누구에게나 늘 후순위로 제쳐두고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당장은 보이지도 않고 그리 큰 문제가 되지도 않기 때문에 뭉개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래도 숙제를 미루고 있는 것처럼 찜찜하다. 이런 것들 중에는 사실 시간이 지나가면 절로 사그라들어서 ‘아, 애초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구나.’ 하고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간혹, 날이 갈수록 오히려 곪아서 나중에는 어떻게 손쓸 도리 없이 회복불능이 되는 일도 있다. 나는 지금 혹시 중헌 일조차도 계속 뭉개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중요하지만 당장 문제가 되지 않아서 돌보지 않는 일들 중에는 건강이라는 분야도 있고 노후생활이라는 주제도 있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아마도 나의 개인적인 종말이 아닐까 한다. 먼 미래보다는 오늘 하루를 잘 사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최상의 지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최상의 지혜가 되려면 나중에 가서 ‘아, 애초에 죽음이라는 거슨 별로 중허지 않었구나. 미루고 뭉개기를 잘했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대비하지 않아서 낭패인 것으로 드러난다면 참으로 운수없고 당황스런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걱정하는 것 중에 40%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고, 30%는 이미 지나버린 것이고, 25%는 시간이 지나면 사소한 것으로 혹은 바꿀 수 있는 것으로 판명나고, 5%는 걱정해봐야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한마디로 세상에는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대체로 현대인들은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이라는 것도 걱정해봐야 의미가 없고, 그냥 잊고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래서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거품이 꺼지는 ‘확실한’ 그 날이 올 때까지는 아프지 않고 스트레스 없이 사는 것이 실용적인 삶의 태도가 되기도 한다. 자이언티는 그래서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oh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하고 노래하였고 사람들은 이런 소박한 바램에 공감한다.

아프기를 각오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프지 않는 것을 인생의 목표(=행복)로 삼기에는, 또 그것을 소박하다고 칭찬해주기에는 뭔가 좀 아쉬운 점이 있다.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다 보면 너무 클라스가 다를 정도로 명품으로 디자인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애초 디자인과 다르게 찌그러지고 고장난 경우도 많지만…). 그래서 아프지 않은 영혼만으로 자족하기에는 뭔가 미흡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치 몇억짜리 자동차의 존재 목표가 고장이 없는 상태로 차고에 소장되어 있기만 할 때 뭔가 아쉬운 것과 마찬가이다. 차는 ‘수리가 필요없는 상태’가 목표라기보다는 달리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찌그러지고 고장이 났다면 다시 고쳐야 하는 것이 맞고 잘 달릴 수 있도록 평소에 소모품도 잘 관리해주고 기름도 넣어두어야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영혼은 그 거룩한 품위를 생각해볼 때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단지 ‘아프지 않은 상태’를 목표로 하는 것은 좀 하찮아 보인다. 단지 웰빙만이 목표라면, 혹은 넉넉하고 교육적 환경에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정서적으로 안정되어있고 타인들과도 구김살 없이 사회적 관계를 잘 형성하는 내적 상태가 인간존재의 목표라면 아무래도 인간의 영혼을 너무 얕잡아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그런 건전한 인간을 배출하는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면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양심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회환경은 ‘최소한의 준비’ 혹은 ‘디딤돌’로서 필요한 것이지 ‘최종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아직도 그 최소한의 요건도 구비하지 못해서 역사는 아직 투쟁중이지만 그렇다고 최소한의 요건으로는 성인(聖人)이 배출되는 일은 없다. 자동차는 달리도록 디자인 되었듯이, 영혼은 빛을 받아서 세상을 비추고 그 열을 전달하는 성인이 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우주의 시간’과 ‘역사의 시간’이 있다. 혹자는 우주의 시간이 맹목적이고 우발적이며 무의미한데, 역사의 시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은 그 안에서 의미들을 창조하고 발전시켜간다고 한다. 무의미한 우주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두뇌를 배출했다는 뜻일까? 우리가 사랑하는 가치들인 ‘자유’ ‘평등’ ‘정의’ ‘사랑’ ‘지혜’ 이런 것들도 사실 인위적이고 단지 진화의 과정에서 집단 유지를 위해 다수가 합의한 공리적 개념일 따름일가? 뭔가 모순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지만, 그래도 사정이 정말 이렇다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다소 서글프겠지만 그냥 무의미한 우주로 다시 돌가가는 것일 뿐이라면 그 때가서는 지난 시절 해오던 걱정들은 모두 ‘아, 애초에 그럴필요가 없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우주의 시간이 맹목적이지 않고 우발적이지도 않다면? 지금 뭔가를 미루고 있는 나는 그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큰 낭패를 보게 될 지도 모른다.

머리카락 빠지듯 나의 종말이 다가온다. 마지막에 가서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미뤄왔던 것에 대해 잘했다고 자평하거나, 아니면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삶은 의미없는 우주의 밤바다에서 아름답게 피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연꽃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삶에서는 다가오는 종말은 저주이고 오직 현재만이 축복이다. 그러나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하는, 혹은 태아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관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애벌레는 소멸되는 고통을 겪어야 나비가 되고, 태아는 양수에서 강제로 쫒겨나야만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듯이 죽음도 그런 과정으로 이해될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고 다만 나는 불안하게 뭔가를 미루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미루는 태도가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인지 아니면 결국 낭패를 가져오게 될지, 허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죽음으로 끝나기에는 너무 클라스 있는 명품으로 디자인된 인간의 영혼에 비추어 볼 때, 영혼에는 뭔가 이 세상에서는 아직 발휘되지 못하고 숨어있는 거룩한 역할과 기능이 있지 않나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오늘도 나는 0도의 녹을듯 말듯한 날씨 속에서 눈이 녹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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