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확신이 있어요.” 10년 전 쯤 성당에서 같이 성가대를 했던 분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이제는 성당에 다시 나오시려나보다.’ 하고 내심 반가웠으나, 금새 실망하고 말았다. 예전에는 그래도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긴가민가’한 심정 때문에 성당을 나갔었는데, 이제는 신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지내는 것이 맘편하다고 하였다. (어느 봉쇄수도원에서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하루종일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나를 포함하여 내 주위에는 그저 조용히 스스로를 돌보고 자신의 취미를 즐기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고보니 내 딸들 역시 그렇다. 생활은 개인적이고 생각은 대중적이다. 진실은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아님에도, 이이들은 손 안의 스마트폰을 통해 너무도 쉽게 세간의 다수 의견을 접하고 그것을 너무도 저항없이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해버리고 만다. 미디어에는 인간의 사적 욕망이 스며있는 대중적 의견들로 넘치기 마련이다. 옵션이 많은 환경에서는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에대한 확신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다. 의미없고 맹목적이며 우발적인 진화 끝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가설에도 친화적이다. 아무렴 어때. 죽으면 그저 우주의 먼지로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에 허무를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희망섞인 위로를 느낀다.
“내가 죽으면 꼭 내 시신을 만져보렴.” 한번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막내에게 이것은 내 유언이라면서 말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제 아무리 전쟁에서 수백만이 죽어가고 있다 해도 마음에 잘 와닿지 않지만, 가족이나 평소 잘 알던 사람의 시신을 보고 만지게 되면 죽음은 개인적인 경험이 되고 이 때 ‘영혼’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믿게 되는 수가 있다. 이런 개인적인 직관이 내 아이에게도 일어났으면 했다. 나는 운좋게도(?) 편안하지 않은 모습으로 굳어있는 어머니의 시신을 본 경험이 있었고 몇년 전에는 눈이 제대로 감기지 않은 지인의 시신을 본 적도 있다.
다 감기지 않은 눈으로 굳어버린 시신은 아무리 그 눈을 다시 감기려해도 소용없다. 억지로 감기더라도 마치 고무처럼 다시 원상태로 눈꺼풀이 돌아온다.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거기 놓여있는 것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냥 돌이나 나무토막이나 마네킹일 뿐 더 이상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동시에, 예전에 저 나무토막에 스며있었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 ‘뭔가’야 말로 살아생전에 내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그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또한, 그 사라진 뭔가는 우주의 먼지로 부서지는 것도, 그냥 연기처럼 홀연히 무(無)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냥’ 알게 된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은 합리적인 추측으로 윤회를 믿게 되었을 것이다. 2500년 전 쯤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살아있는 소 옆에 죽어있는 소를 보고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진실을 모를 때는 상식이 최선일 수도 있다. 어쨋든 내가 보기에는 죽어서 남긴 저 나무토막같은 것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은 좀 어리석어 보인다. 보이지 않고 무게도 없고 부피도 길이도 없지만 뭔가가 존재하고 있고, 이 세상은 어떤 보이지 않는 원리에 따라 운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우주는 이미 짜여진 무슨 프로그램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는 초보적인 생각도 차라리 ‘맹목적인 우주’라는 관점보다는 낫다. 그러나, 막상 내 아이들은 그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어떤 프로그래머의 의지에 따라서 생긴 것이 아니라, 운동장에 놓인 컴퓨터와 키보드 위에 번개가 지속적으로 우연히 내리쳐서 짜여진 것 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빅뱅으로부터 지금까지 137억년의 시간이면 무슨 놀라운 일이든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식이다.
아이들은 죽음이 벗겨낼 때 남게되는 어떤 실체에는 관심이 없다. 어쩌면 나 역시도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이 끝이라면 인간의 운명은 비참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음이라는 현상에서 비참함을 읽을 시간이 없듯이, 인위적인 행복과 함께 버릇없이 늙어가는 나도 스스로 비참한 운명이라고 느낄 시간이 없다. 아이도 나도 주위에는 만지작거릴 장난감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70, 80년대 서양에서 엄청 유행했던 ‘Amazing Grace’라는 찬송가가 있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비참한 존재) like me.’ 그러나 몰두할 심심풀이가 많을수록 ‘비참할 시간이 없다.’
비참이 없는 곳에는 구원의 필요가 사라지고 희망도 같이 없어진다. 나는 비참하지도 않다면 누가 나를 왜 어떻게 구해주겠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며고, 그런 호의가 달갑게(sweet)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희망은 스스로 비참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축복이다. 그러한 고백에는 그 비참이 어쩌면 내탓이라는 겸손함도 포함되어 있다. 나의 비참함이 우주의 탓이라거나 남의 탓이면 오직 절망이나 분노나 우울에 빠지겠지만, 내탓이라고 선언하는 곳에는 놀랍고도 달콤한 희망이 있다. 스스로 자신의 완고한 두껑을 열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 ‘죄인’이 되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자신이 비참한 신세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생명’이라는 것을 품고 발목은 다른 사람들과 족쇄로 연결되어있으며, 모두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이고, 일부는 내 눈앞에서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 역시 차례가 되면 그리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서로 바라보며 슬픔과 절망에 싸인 채 순서만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나의 비참한 조건이다.
그래서 나의 방어기제는 괴로운 인지상태를 바꾸는 작업(회피)을 하게 되고 내 방 안에 큰 코끼리를 한마리를 들여놓아서 한가한 생각일랑 하지 못하게 만든다. 누워서도 천장에 그리게되는 취미를 가진다든가, 전쟁이라는 위험한 옵션마저 만지작거릴 수 있는 권력을 추구한다든가, 짜릿한 도박(좋은 말로는 투자)을 할 수 있도록 돈을 모은다든가… 그러나 이러한 몰입들은 어찌보면 화제전환, 영어로는 diversion, 속된 말로는 심심풀이 예능일 가능성이 많다.
코끼리를 내 방에서 다시 몰아내는 것은 쉽지않다. 아무것도 없는 자기 방에서 1시간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감옥이 왜 그렇게 싫은지, 골치아픈 죄수에게 왜 독방이라는 벌을 주는지를 생각하면 시사하는 점이 많다. 고대에는 고독을 하느님의 선물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무지막지한 고문이 되었다. 두려움과 함께 나도 몰래 어느새 코끼리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죽음에 대해 가장 소름돋는 부분은,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때는 도와줄 사람도, 아내도, 이이들도, 만지작거리던 코끼리도 없다. 진정 혼자이다.
어쩌면 하늘에서 놀랄만한 선물이(amazing grace) 소낙비처럼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나라는 항아리는 속에 가득찬 콜라가 희석되는 것이 싫어서 마냥 두껑을 완고하게 닫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내 독은 간장종지만하면서도 하늘의 비를 다 담았다고 자만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건너는 고독한 사막의 여정에서 나는 어쩌면 지난 날 두껑을 열어 콜라를 쏟아내고 물을 가득담아두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지나 않을까 모르겠다. 사막에서는 위로와 희망이 되는 것은 오직 물 뿐이다. 오늘 나는 나 자신과 나의 아이들이 ‘긴가민가’하는 마음이라도 계속 간직하며 두껑을 열어두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