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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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수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인생은 의미가 있는 하나의 스토리라 할 수 있다. 때로는 끊어져 조리가 없을 수도 있으나 인생의 마지막에는 훌륭한 스토리가 될 수 있게끔, 그래서 훌륭한 인생을 살았노라 말할 수 있게끔 살아가라.” 그러자 어느 학생이 말했다. “교수님 말씀은 멋있고 끌리는 데가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제 경우에는 인생에 무슨 스토리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냥 시트콤 같습니다. 그냥 매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뭔가를 하고 경험도 하기는 하는데 이런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또 서로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냥 잡다한 경험의 단순 집합체 아닌가요?”

고등학교 때에는 ‘경험’을 많이 한다는 것은 죄악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면 모든 게 달라지겠거니, 대학 생활 중에 다양한 경험을 하면 되겠거니 하며 죽도록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대학에 결국 들어갔다. 이제는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래야만 졸업 후의 나머지 인생을 현명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무지한 행위들로 점철된 생활이었다. 도무지 ‘다양한 경험’으로 미화하기 힘든 시간 낭비의 연속이었다.
다음은 직장 생활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직장생활은 매일매일 일과의 단순한 연장일 뿐, 도대체 내 인생에 무슨 의미 있는 스토리가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역시 이런 저런 잡다한 경험들이 내 삶에 계속 던져지고 있었고 나는 그 속을 헤엄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진리’를 입에 담으려면 눈치를 봐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생에 의미(point)가 굳이 있어야 하나?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굳이 삶의 스토리로 짜여져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는 경험이 많은 사람, 산전 수전 다 겪은 사람이 장땡이다. “자신이 한 일에는 후회를 하지 않는다. 다만 하지 않아서 후회할 뿐이다.” 미국의 어느 늙은 과학자가 ‘Dance with the star’ 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멋진 말이다. 일견 심오한 인생철학을 느낄 수도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경험의 잡식성에만 치중한 허세 가득한 말이기도 하다. 살아오는 세월 동안 한 일(선택)들은 그냥 ‘했다’만 중요하다. 과연 그에 대해서 하나도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 미래에 또 무슨 경험을 할까 만을 생각하는 것이 건전할까?

이런 말도 있다. ‘자신이 살아오며 선택했던 것 중에 그 어떤 것도 후회할 필요 없다. 그 때문에 현재의 네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환경에서는 지혜로운 말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선택과 행위 때문에 현재의 내가 훨씬 저급한 사람이 되어있거나 훨씬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면? 이기적인 선택만 해와서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있다면? 또 어떤 학생은 마리화나를 시작했는데 종국에는 피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고 아침에 피지 않으면 잠을 깨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무차별적인 경험이 다다익선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수많은 경험을 무의미하게 쌓기만 할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경험하는 작업이 중요한 것 같다. 우리의 우리됨을 만들어가는 것은 지나온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인격에 따른 일관된 선택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선택이야말로 내 삶의 색깔을 결정한다.

선택이라는 것이 쉬운 과정은 아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또 왜 사는지를 알고, 그에 상관되는 삶을 그대로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직 이럴 때만이 일관된 느낌의 스토리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현명하게 선택하는 실용적인 방법은 없을까? 참고로 어떤 가톨릭의 성인은 다음의 방법을 제시한다. 1. ‘좋은’ 옵션들으로 압축한다. (좋은 옵션과 나쁜 옵션 중에서 고르는 것은 이미 명백한 문제이므로 선택의 문제가 아님). 2. 확실한 정도에 따라 3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어떤 옵션을 선택할지 그냥 아는 경우이다. 배우자, 직장, 전공 등 ‘그래 바로 이거였어.’ 하는 느낌을 갖는다. 그런데 모든 선택이 이처럼 자명하지는 않다. 2단계는 감이 오지 않고 다소 모호하다. 이때 무엇을 할 때 자유를 느끼고 평화를 느끼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느낌이 외부환경(혹은 상대방)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3단계는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위로도 확인도 찾을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때는 두뇌를 동원한다. 장단점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도 구하고 신중히 생각해 보기도 한다. (종교인의 경우 기도도 한다.) 그리고 일단 시험적으로 살짝 시도해는 과정을 갖고 그 결과에 따라 필요한 조정을 조금씩 한다. 3. 이 모두 거치더라도 혼란스러울 경우 상상력을 동원한다. 내 안의 가장 밝고 빛나는 모습, 나의 최상의 version이 지금 바로 앞에 어떤 선택에 직면했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할까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종교인이라면, 죽을 때 신에게 내밀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죽고나서 신과 마주한다고 할 때 ‘나는 이 둘 중에 당신을 위해 이런 선택을 했소’ 할 수 있는 선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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