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823

12월 말에 한국을 가면 고향에도 찾아가 볼 예정이다. 13가구가 낮은 산 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시골 마을, 그리고 동네 어귀 들판 사이로 흐르던 시냇가는 이미 너무도 많이 모양이 달라졌고 이제 인근에는 낯선 아파트가 여러 동 들어서 있다. 어린 시절 길가 코스모스 가득하던 고향 마을은 이제 몇몇 추억의 단편들 속에만 멀리 남아 있다.

대학 1학년 교양과목 시간에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이동원/박인수의 노래보다 먼저 접했다. 모두 감동이었지만 특히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라는 싯구는 내 모세혈관 하나하나 머리카락 끝까지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나에게는 어린 누이도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이제 고향은 내 기억 속에서 전설바다 밤 물결 같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서양에서는 대체로 10월 초 추수감사절 무렵에 고향으로 찾아 든다. 사실은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온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고향이라는 개념은 약해서, 자기가 태어난 집이 그대로 있고 자기 방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나 책이 아직 쌓여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리운 부모님이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면 어린 시절 자랐던 고향 자체에 향수를 느끼며 다시 찾는 경우는 좀 드문 것 같다. 이들은 장소를 찾아온다기 보다는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느끼는 고향에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자리하고 있지만 자랄 때 주위를 감싸고 있던 것들에 대한 향수도 강하게 배어있다. ‘넓은 벌, 실개천, 황소, 질화로, 밤바람, 풀섶이슬, 서리 까마귀, 초라한 지붕…’

이젠 고향을 떠난 지 25년이 넘었고 부모형제도 거기에 없으며 어린 시절 보았던 산천의 모습도 새로 생긴 고속도로 때문에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그곳은 여전히 특별하다. 모습이 바뀌었다고 해서 스며있던 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냥 여전히 그곳에 조용히 있기만 해도 좋다. 그곳이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다. 뭔가를 성취하면 특별해지고 유니크한 존재가 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기를 쓰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남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남부럽지 않은 자녀로 기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넓어서 어디를 가나 더 능력 있는 사람이 있고, 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있으며, 더 화려한 스펙의 자녀를 둔 부모를 만난다. 성취를 통해 특별함을 추구하고 그래서 소중한 사람이 되려고 했지만 넓은 세상에 나오니 열등감만 생긴다. 90년대 설문조사에 따르면 가장 열등감과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학생들이었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취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 소중한 존재,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그런 착각 속에 우리는 허둥대며 세월을 허비한다. 내가 이룩한 성취를 즐길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나의 특별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공한 몇몇 래퍼들은 일부러 몇 억짜리 수퍼카를 여러 대 구입하고 비싼 펜트 하우스에 살며 금붙이로 치장하면서 스스로의 특별함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시를 통해 자신의 성공을 즐기는 것일 뿐 그것이 그들을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더 크게 성공한 사람을 만나는 순간부터 오히려 열등감에 시달리기가 쉽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이러한 오류에 빠진다. 그리고 끊임없이 뭔가에 대한 성취로 스스로의 특별함, 소중함, 유일함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특별하고자 하는 욕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왜 내가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인간은 그다지 악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해야 하는 만큼 충분히 선한 존재도 아니다. 스스로 좋은 일을 많이 함으로 인해서 스스로 특별한 존재가 되기는 좀 글렀다. 어떤 사람이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라면 그것은 그 사람이 이룩한 업적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그 사람이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고향이 특별한 것은 그 모습이 정지용 시인의 시처럼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답게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유일하기 때문이고 나에게 소중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NO COMMEN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