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가자.” 아래층 현관에서 몇 번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힘들게 눈을 치우고 나니 피곤했는지 급기야 목소리에 독이 번진다. 분명히 7시50분에 집을 나서자고 신신당부해 두었건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한두 번이 아니다. 문제는 스마트폰이다. 잠깐이라도 틈이 생기면 학교 가기 직전이라도 아이들은 어김없이 방이나 화장실에서 이어폰을 낀다. 이어폰 품질이 너무나 좋아졌다. 그러나 기술이 진보하니 애들과의 단절은 더 심해진다.
길을 나서니 생각보다 눈이 많이 왔다. 좀 더 큰 길들은 눈이 치워지고 소금이 뿌려져 있었지만 집 주위 골목길은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다. 녹을듯 말듯 미끄러워서 차가 나가는데 애를 먹었다. 요즘 SUV 시장이 이렇게도 발달한 것은 TV광고가 사람 속에서 부추긴 허영 탓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일반인들이 일년에 산과 들로 무거운 SUV를 타고 레저를 즐길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겨우 시장보러 가기 위해 SUV를 구입하는 꼴이라고 25년 전 경영학 수업시간에 우리 모두 비웃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욕망의 힘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SUV 시장이 이렇게도 커지리라고는 당시 우리들 중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서 SUV를 탐내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허영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4륜 구동의 SUV가 너무나 부러운 날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씨에나 미니밴이 작은 플라자로 들어가는 턱에 바퀴가 걸려 헛도는 바람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장정 서너 명이 뒤에 붙어서 같이 밀고 있는 모습을 지나왔다.
집 골목으로 들어서니 앞집 아저씨가 눈 치우는 기계로 너무도 편안하게 차고 앞길을 치우고 있었다. 휘파람을 불면서 기계를 몰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집을 나서기 전만 해도 기술과 문명이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아서 싫었었는데 몸이 고생한 탓에 마음이 간사해졌는지 금새 문명에 호의적으로 돌아섰다.
문득 작은 승용차로 일하러 나갈 아내가 걱정이 된다. 작년에 주택지역 골목을 누비다가 작은 턱에 걸려 낑낑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마침 주위 길가던 사람들이 도와줘서 그때마다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눈이 쌓이기만 하면 그 일이 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좀 저렴한 SUV로 차를 바꾸고 싶어했지만 내 고집으로 차를 좀 수리하고 신발(스노우타이어)만 바꾸는 선에서 겨울을 맞이했다. 켕기는 마음에 혹시 바퀴가 또 빠질까봐 휴대용 삽과 나무판대기 몇 개를 뒷좌석에 챙겨주었다.
비슷한 곤란을 겪어서일까? 여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차가 눈에 빠진 것을 보면 지나다가도 소매를 걷어 부치고 달려들어 도와준다. 작년에 폭설이 내린 날 차가 딸 친구네 집 근처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이를 목격한 이웃 아저씨가 자기 트럭과 밧줄로 우리를 구출해 준 적이 있다. 한번은 밤 열두 시 넘어서 집으로 오다가 바로 우리 집 모퉁이에서 눈 쌓인 잔디에 차가 처박힌 적도 있는데 그 때도 이웃집 아저씨가 우연히 창문 너머로 이를 목격하고는 트럭을 가지고 와서 밧줄로 끌어내 주기도 했었다. 외지인에 대해 보수적이라고 소문난 런던도 눈 인심 하나는 따듯한가 보다.
사람들은 자기가 배우고 경험한 것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 고대 사람들은 세상이 물 속에 떠 있는 버블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하늘, 별, 해와 달, 육지, 바다는 이 버블 안에 있고 버블 밖의 우주는 온통 혼돈의 물로 가득하다고 상상했다. 그래서 하늘의 창문이 열리면 비가 내리고, 땅을 파면 물이 솟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학교, 책, 미디어를 통해서 접한 천문학 지식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 똑같은 파란 하늘을 바라보지만 고대인들에게는 버블이 터지면 대홍수가 일어나는 물 아래의 하늘이고 우리들에게는 인공위성이 돌고 그 너머 혹성들이 암흑 속에서 공전하는 하늘이다. 세상을 맨 눈으로 보는 것은 딱 한번, 태어나서 처음 세상을 접할 때뿐이다. 그 이후로는 지식과 경험이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세대가 달라서 온갖 기술과 문명의 이기들 속에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 나와는 다른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2세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은 마치 고대인들과 소통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 동안의 공부와 조율이 필요한 것 같다. 고대인들이 남긴 글과 문화를 통해 그들과 대화하려면 내가 그들의 시대로 돌아가 그 환경을 배울 수 밖에 없듯이, 아이들과 소통하려면 그들을 둘러 싼 환경을 살피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에 식탁에서 투덜거렸다. “다른 캐나다 집에서는 엄마도 애들도, 심지어 딸도 나와서 집 앞 눈을 치우던데 우리 집은 나만 고생하는구나. 기계 있는 집이 부럽다.” 그랬더니, 딸이 말한다. “아빠, 우리도 도와드릴 수 있어요. 우린 spoiled children이 아니잖아요. 같이 치우자고 말만 하면 나가서 함께 눈을 치울 수 있어요.” 딸아이의 말이 소금이 되어 내 마음의 눈을 녹인다. 그래, 이제 이어폰 껴도 좋다.
아이들과의 단절은 문명이 발달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내 속이 근거 없는 판단들로 온통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지 싶다. 이번 겨울에는 눈 인심이 이웃과 우리 집을 이어주듯, 폭설이 나와 아내와 아이들을 연결해 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