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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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언짢다. 아내와 나는 아들의 말투에서 묻어나는 태도가 불만이다. 이미 아들은 우리 부부가 생각하는 네모 지대에서 어지간히 벗어나 있다. 아들의 인성이 이제는 시야보다 더 커졌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성장해버린 것이다. 갈등이 생겨 대화라도 해볼라 치면 마치 코끼리의 다리를 더듬고 있는 기분이다. 아들이라는 우주의 작은 조각만이 부모의 조그마한 망막에 맺혀 있을 뿐이다. 그 맺힌 것으로 아이를 야단치고 나무라고 있다. 이제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접근방식은 개입과 관여가 아니라 관찰과 피드백 정도인가 보다. 수줍은 의견을 조심스레 넣어보고 그것이 아들의 우주 모퉁이에서 언젠가 싹이 트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햇볕 같은 한줄기 씨앗을 뿌려 놓으면 온도와 습도가 맞는 어떤 좋은 날에 작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어느 차디차고 후미진 구석에서 결국 말라버릴까?

언변으로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지는 못한다. 일단 가능하지 않고 내게는 자격도 없다. 나의 몫은 그저 자그맣고 사각형 모양으로 각진 내 영혼에 투영되는 그의 모습에 대하여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일인칭 문장으로 피드백을 해주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인생을 한참 걸어온 사람에게는 이마저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자녀에게 만큼은 선한 의지를 가지고 그나마 수월하게 피드백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마음 한 구석에 아무와도 언어로 소통되지 않는 우울한 구석이 있는 법이다. 빨간색과 보라색을 넘어서는 색을 눈으로 볼 수 없듯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는 내게 보이지 않는 영역이 있다. 박쥐나 돌고래가 듣는 소리를 내가 들을 수 없듯이 아들의 어떤 부분은 부모의 감각으로 포착되지가 않는다. 자녀 앞에서 이제는 좀 겸손해져야 하나보다.

내 인식의 그물에 잡힌 모습이 다가 아님을, 어쩌면 진실에서 한참 떨어져 있을 수도 있음을 늘 잊고 지낸다. 개미는 늘 기어다니기 때문에 세상이 평면(2차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잠자리 눈은 확대해서 보면 몇만개나 되는 낱눈으로 되어 있어서 모자이크 세상을 본다는 것, 개는 색맹이어서 흑백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 내가 보는 세상은 온전한 모습이라고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 사실 인간이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보장은 없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 역시 감각적인 오감과 이성적인 범주들(시간, 공간, 인과관계 등)에 주어지는 것들만을 인식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미든 사람이든 자신의 한계 만큼만 세상을 알 수 있다. 누가 더 진실에 가까운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인식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존재의 진짜 모습을 칸트는 ‘물자체’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 물자체의 세상을 알지 못한다.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듯, 그저 유전적으로 주어진 능력 안에서 물자체의 일부만을 성긴 인식의 그물로 파악하는 것이다.

나에게 보이는 세상이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마음을 무척 겸손하게 만든다. 아들의 못나 보이는 모습 조차 그 알 수 없는 신비한 존재의 그저 작은 조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내 망막을 넘어서는 신성함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찌 내가 아들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사도 바오로는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리피2장)라고 했다. 겸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셈이다. 어떻게든 남보다 나은 점을 만들어야 나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길들여진 세상에서 이 조언을 따르기란 대략 난감하다. 우리가 자란 방식은 열등감과 교만의 양극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할 뿐, 겸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트레스를 달고 산다. 남보다 뭔가 낫기 위하여 치열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들 앞에서 내가 진심으로 겸손해질 수 있을까? 아들 너머에 있는 ‘물자체’를 바꾸겠다는 어리석고 교만한 생각을 버릴 수가 있을까? 내 그물에 잡히는 한도 내에서 선량한 피드백을 해주지만 그게 씨알이 먹히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든 사람에게는 나를 뛰어넘는 신비로움이 있다. 모든 것이 나보다 나은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늘 그것을 잊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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