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와 후라이드 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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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용태 신부의 강의 발췌> 신호등 2015.07.03호

(편집자: 닭 여러분에게는 미리 사과드립니다.)

우리는 무수한 걱정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발전적인 것들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대부분이 쓸데없는 걱정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첫째로,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하는 경우입니다. ‘그 때 내가 쌍피를 내놨어야 되는데 아니면 그 때 내가 스톱을 했어야 되는데….’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 판에 잘해야죠. 두번째는, 아직 오지도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는 경우입니다. ‘우리 딸 애가 나중에 자라서 사윗감이라고 데리고 왔는데 이상한 녀석이면 어떡하지?’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요. 아직 초등학생인데. 마지막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비행기를 타고 있는데 ‘이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떡하지?’ 떨어지면 죽을 수 밖에 없겠지요. 이건 본인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모든 걱정들을 내려 놓고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쓸데없는 수많은 걱정을 내려놓고 편하게 쉬라고 시간을 주어도 사실 우리는 잘 쉬지 못합니다. 그래서 쉬고 난 다음에 녹초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쉰다’는 개념을 ‘일 안하거나 일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사장이 ‘자네 내일부터 푹 쉬게’ 한다면? 취업 못해서 괴로워하던 자식이 ‘엄마, 나 돈 좀 주세요. 어디 좀 며칠 쉬고 올께’ 한다면? 쉬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겠지요. 쉰다는 말에는 뭔가 다시 살리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휴식이 나를 살리지 못하면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방탕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주님, 제 영혼이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제 영혼이 평안함이 없나이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자신을 살리지 못했다는 고백이겠지요.

우리는 세상에서 쉬려고 무수히 노력하지만 점점 더 피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숨 돌릴 틈도없이 살아갑니다. 좀 더 잘살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애초에 잘 살수있는 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신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참 삶을 위한 여정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편한 것이 선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고, 좋은 것이 옳은 것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지금의 삶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어렵다하더라도 우리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해 떠나야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산에서 독수리 알을 가져다 닭장에 넣었습니다. 독수리는 자라면서 자신이 다른 애들보다 덩치가 좀 큰 닭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주인이 주는 모이만 먹다가 어느날 하늘에서 큰 새가 우아하게 날고 있습니다. 처음보는 아름다운 광경에 황홀해 합니다. 친구 닭에게 ‘저분이 누구신가’ 하고 물으니 ‘저분은 독수리이신데 하늘의 제왕이셔. 너나 나나 닭이니까 꿈도 꾸지마.’ 주인이 주는 모이만 먹고 살면 평생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옳다고 볼수만은 없겠지요. 독수리가 만약 자신의 본성을 찾고자 한다면 고난의 여정이 필요합니다. 일단 주인 몰래 닭장을 뛰쳐나와야합니다. 그리고 독수리의 야성, 하늘에 대한 본능을 일깨우기 위해 산으로 가야합니다. 그리고 퇴화된 날개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수천번을 절벽에서 깨지고 터지며 뛰어내려야 합니다. 그러다가 ‘오늘도 깨지겠지’ 하며 떨어지다가 드디어 비상하게 됩니다. 이것이 특별해보이지만 정작 독수리 자신에게는 본래 자기 모습인 것입니다. 자칫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인데 닭인줄 알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후라이드 치킨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잘 살아보는 것이 주제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잘 살고 싶어하고 그러기 위해 찾아 헤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이것만큼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이 또 없습니다. 누가 ‘저기 저 빨간 대문 보이시죠? 저집 잘 살아요.’ 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저집은 부자구나.’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잘 산다는 것이 돈 많은 것과 동일시 되는 세상입니다. 삶을 구성하는 극히 일부분이 잘 사는 것의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삶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잘살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돈을 모이게 해주시는 분이라는 결론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잘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속뜻은 곧 ‘돈주세요’ 하는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의 신앙의 위기는 엉뚱한 곳에 기도하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산업화와 자본주의입니다. 시대의 절대가치인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이 세상을 다스립니다. 최고의 미덕은 돈을 많이 가지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잘 산다는 것은 그래서 ‘돈이 많다’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시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입니다. 개입을 자제하고 무한경쟁시켜야 발전과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주의입니다. 부지런하고 똑똑한 사람/나라들이 시대를 주름잡아야 뒤처지는 사람/나라도 분발하게되고 결국 발전과 성장의 혜택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힘있는 자가 모두를 가지는 승자독식으로 양극화가 일어납니다. 이 상황에서 애초에 경쟁이라는 것이 무의미할 경우가 많습니다. 다리를 저는 사람과 운동선수가 겨루는 식입니다.

100미터를 10초에 달리는 사람은 목발 짚는 사람을 기다려서 같이 가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발짚는 사람은 도태되고 힘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세상이 됩니다. 세째로, 이시대는 정보화시대입니다. 정보가 힘입니다. 정보를 독점할 경우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킬 수도 있습니다. 나쁜 사람도 아주 좋은 사람으로, 추한 것도 아름답게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사람은 힘있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에서는 대치동 ‘돼지엄마’의 파워가 장난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살고있습니다. 최고의 가치는 돈과 힘입니다. 잘산다는 것은 돈과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발맞춰 더많이 벌고 더높이 올라가려고 스트레스 받아가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신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주는 신으로 전락하지 않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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