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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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시절 우리 동네에는 TV가 있는 집이 한두 집 밖에 없었다. 밤이 되면 어른들은 그들 집 마당 평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흑백의 드라마를 보며 대낮의 고단함을 잊곤 했다. 동네 아이들은 조금 일찍 6시와 7시 사이에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았던 그 집 안방으로 찾아가서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귀탱이에서 보곤 했는데 그 시간은 무엇과도 비교할 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순간이었다. 마침 집주인이 저녁 식사를 할 무렵이라 같은 방에 마주하니 서로 난감했지만, 때때로 동네 밖에서 풀을 뜯던 그집 염소들을 해가 넘어가면 대신 끌고 와 주는 수고를 해줌으로써 민망함을 다소 덜곤 했다. 그 시간은 ‘이상한 나라의 폴’과 ‘버섯돌이’를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도 감수할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에 아이들이 TV 앞에서 보고 있던 애니메이션을 우연히 같이 보았다. ‘쿠보와 전설의 악기’라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이었다. 40년의 세월을 지나 디지털 기술은 아이들 앞에서 실로 극강의 비주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같이 보지 못하고 자리를 일어서고 말았다. 내가 사랑했던 ‘폴’을 지금 저기에 갖다 대면 너무나 볼품없는 그림이었겠지만 당시에는 저런 현란한 자극이 없어도 내 심장이 녹아 내리게 하기 충분했었다.

우리는 지금 시대의 무엇과 과거의 비슷했던 무엇을 당대의 평면에서 쏙 끄집어 내어 둘만을 비교함으로써 쉽게 오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폴’과 ‘쿠보’의 기술력만을 비교한다면 ‘폴’은 미개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사실 ‘폴’에는 그 시대의 현재를 살아가던 아이들 마음을 진정으로 녹이는 감동이 있었다.

시간은 현재의 연속이다. 삶은 늘 현재요 가을이요 전체이다. 그리고 현재는 늘 미지와 감탄으로 가득하고 늘 이유가 있다. 그래서 ‘원시시대’나 ‘암흑시대’ 등의 어휘에는 우리의 부적절한 오만이 숨어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한정된 문헌과 상상력으로 옛 시대를 재구성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마치 미신과 무지몽매의 늪에서 가련한 삶을 살았을 것 같은 착각을 하지만 사실은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선조들도 여전히 희로애락과 진정성이 가득한 절절한 삶, 사랑하는 삶을 각자가 살았던 것이다. 누가 누구를 멸시할 수 있으랴.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 교만하기 짝이 없는 입장에 설 때가 종종 있다. 자연현상에 대하여 선조들이 미신적인 두려움에 휩싸였다는 것에 대해서 미개했다고 평가를 한다. 기적적인 일들은 자연과학이 아직 해명하지 못한 사건일 뿐 언젠가는 과학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철썩같이 믿는다. 지금은 가볍게 치료되고 마는 병 때문에 수천명이 불필요하게 목숨을 잃었다거나, 계몽 되지 않은 시대정신 때문에 작위적인 계급주의 사회에서 미천한 삶을 살았다고 그들을 측은해 한다. 오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래된 시대를 하대하는 마음은 자식의 삶이 늘 불만스러워 잔소리하고 계도하려고만 드는 부모의 마음과도 맞닿아 있다. 부분만을 끄집어 내어 자신의 부분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눈에는 늘 자식의 “어떤 면”이 불만스럽다. 그러나 시대를 달리하여 부분만을 비교하는 것은 오류이며 착각이다. 아이의 현재는 나의 과거가 아니다. 이이들에게 시간은 늘 진정한 현재이고 전체이며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삶이다.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은 유독 눈에 잘 띄는 혹부리와 같지만, 그래서 얼굴에 있는 저 혹만 띄어내면 자녀가 미남미녀가 될 것같지만 막상 그 혹을 잘라내면 아이는 피를 쏟아 죽어버릴수도 있다.

선조들이건 아이들이건 생명을 가졌음으로 인해 모두가 정당하다. 생명은 늘 현재이다. 우주 중심에 놓인 한 생명을 주위로 사랑하는 영혼들이 공전한다. 그 중심이 소멸한다면 우주도 종말을 맞는다. 생명은 그저 한줄기 바람에 날리는 먼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미숙하고 유치한 면도 품고 가는 소박한 전체, 곧 ‘영혼’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를 비웃고 자식들을 훈계하던 우리 철없는 정신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고 만다.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의 편리함이나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적 진리가 아니다. 갈릴레오는 스스로 옮음을 알았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지는 않았다. 그러나 좀 무식해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평범한 사람들은 과학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목숨을 바친다. ‘영혼’으로 표현되는 삶의 정수는 죽음 앞에서 선홍빛처럼 또렷해진다.

내 생명이 먼지로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영혼이 썸을 탓던 그 액기스의 기억만큼은 어떤 식으로든 우주 한켠에 보존이 되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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