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미국에서 여행을 다니거나 지인들을 방문하곤 할 때는 지도를 보고 여기저기 찾아 다녔었다. 지도가 상당히 상세하고 도시지역은 가로 세로 구획이 분명해서 목적지를 찾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지만 도시 지역을 벗어난 곳에 있는 숙소를 찾아갈 때면 길을 여러 번 헤매곤 했다. 그래도 나는 지도를 잘 보고 방향 감각도 좋은 편이어서 늘 길을 잘 찾았고 그래서 함께 다니던 사람들에게 우쭐대곤 하였다.
그러나 요즘은 워낙 내비게이션이 발달되어 있고 스마트폰도 믿음직해서 지도를 잘 보는 능력이란 하찮아져 버렸다. 중간에 길을 잃어도 내비게이션이 자동으로 길을 조정해서 새로운 루트를 알려준다. 목적지를 잃을까 초조해하는 일도 없어졌다. 그러면서 점점 길을 잃었을 때 빛났던 그 방향감각도 퇴화되어간다.
내 삶에도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도도 없이 방향감각에만 의존하기에는 삶이 너무 버거운 상대이다. 내비만 있다면 목적지를 입력한 후에는 중간에 헤매어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을 것이다. 정해진 길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다. 아무데나 충동적으로 옆길로 새 보는 모험을 안심하고 저지를 수도 있다. 도대체 지금 여기가 어디쯤인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목적지가 있기나 한 것인지, 마치 어둠 속에 홀로 내던져진 아이가 되어버린 느낌으로 밤잠을 설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남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받을 때 깊은 자책에 빠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는 목적지를 알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서 주소를 입력하기가 애당초 곤란하다. 목적지가 없다면, 이를테면 우주의 모든 질서가 물질적인 우연의 산물이고 우리에겐 죽음이 최종 목적지이며 어차피 모든 것이 먼지로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면 지금 삶이 오리무중이 되어버린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가 되기 쉽고 선악의 경계도 사라진다. 남이 어떤 고통에 빠지건 내가 많이 가지는 것, 육신이 건강한 것, 남들에게 인정 받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될 것이다. 굳이 남들을 고려한다면 기껏해야 주위 사람들 모두가 덜 고통스러운 것,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공리)을 추구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어쩌면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저질러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런 마음으로 돈벌레 같은 주인집 할머니를 정당하게(?) 살해했다.
그러나 그는 막사 일을 저지른 후에는 마음 속에서 기묘한 가책으로 시달린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지 못해도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타고난 방향감각, 어렴풋하게 새겨진 나침반 정도는 있나 보다. 어떤 사람은 이를 ‘양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연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를 어긴다 해도 들키지만 않으면 처벌 받지도 않고 누가 뭐라 하지도 않지만 속으로 심하게 가책을 받는다. ‘낳아준 부모를 잘 모셔라, 사람을 죽이지 말라, 배후자 외 다른 사람과 관계 맺지 말라,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 남을 해치는 거짓말(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남의 재물과 아내를 가지려 하지 말라’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뿐인 하느님을 공경하여라’ 역시 자연법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사람은 마음 속으로 무언가를 섬기게 프로그램 되어있기 때문이다. 신을 섬기지 않으면 다른 것(돈, 권력, 인기, 자신(혹은 가족), 건강, 심심풀이)을 섬긴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가 부르짖은 진정한 자유인(초인)은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
히브리어로 ‘죄’의 어원은 ‘과녁을 벗어남’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인간 세계의 폭력과 타락과 방황은 모두 과녁을 제대로 겨누지 못해서 생기는 괴로움들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혹시 자연법을 모두 지키면 방황이 사라질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법은 대체로 최소 요건이거나 기본적 토대일 뿐 그것을 지킨다고 해서 자유가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 말라’를 지킨다고 해서 행복해질 것 같지는 않다. 보통사람들은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뭔가 일을 저지를 용기도 없고 대체로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래도 헤매고 있다. 우리에게는 ‘~하지 말라’를 넘어서 ‘~해라’라는, 정조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과녁이 필요하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 같은. 혹시 진리라는 것이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목적지는 내 지성의 힘으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럴 수 있었다면 ‘실존주의’가 애초에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당장 현실적으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자연법 이외에 ‘~하지 말라’를 좀 더 가지고 오는 수준이다. 예를들면, ‘1 내가 원하는 것을, 2 내가 원하는 때에, 3 내가 원하는 만큼, 4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지려고 고집하지 말라’ 와 같은 것이 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끼친 고통의 원인에는 그런 공통점이 있었다. 1번 3번은 당장 그만두기 힘들 것 같지만 2번(시기) 4번(방식)은 노력만 한다면 좀 유연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때와 내가 원하는 방식을 덜 고집해도 좀 더 가까운 사람들에게 관대해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가톨릭 사람들은 부활절로부터 40일(주일 빼고) 전이 되는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금욕과 자선을 실천하며 지난 날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는 시간(사순절)을 가진다. 시작하는 수요일에는 이마에 재를 바르고 자신이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갈 것’임을 상기한다. 고대 유대인들은 참회할 때 머리에 재를 뿌리고 간혹 똥을 바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러나 예식의 의미도 무색하게 나는 이번 사순절에도 역시 배부르게 먹고 나의 편리에만 골몰하며 결심과 상관없이 내가 생각한 때와 방식을 여전히 고집하며 주위에 피해를 끼치고 있다.
나는 오늘도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