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성인이 되기까지 유난히 긴 성장과정을 거친다. 이 시기에 뇌의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회적인 환경이다. 아이는 성장기에 부모를 비롯한 타인과 충분한 사회적 교감을 통하여 배우고 느끼며 그 뇌세포를 완성해간다. 뇌는 성장기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여러 가지 사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독특한 ‘자아’를 형성한다.
어린 시절 내 고향에서는 눈이 드물었다. 그래도 한두 번은 꼭 내렸기에 겨울이 되면 눈은 기다림과 설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산과 들에 쌓이는 눈을 보면 왠지 설렜다. 런던에서 겨울을 몇 번 나는 동안 삽질에 신물이 난 적도 많지만 가슴 한 켠 눈을 향한 애정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또 소리에 예민한 편이다. 적막한 시골, 투박한 경상도 가시내들의 머슴애 같은 말투를 싫어하며 자라서 그럴 수도 있다. 남자들은 여성을 볼 때 목소리에 상관없이 얼굴만 이쁘면 된다지만 나에게는 목소리가 무지무지 중요하다. 이런 것들이 ‘나’를 이루고 있는가 보다.
뇌의 잠재력에다가 성장기의 경험이 더해져 지금의 ‘나’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면 그 ‘나’라는 것에는 일관된 정체성이라는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주어진 세상사라는 것이 일관된 것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내 안에는 이런 자아 저런 자아가 모순되게 공존하나 보다. 주변에서도 흔히 우리는 거룩하던 사람에게서 비열한 모습을 보기도 하고, 광폭한 개망나니에게서도 지극한 효심을 보기도 하니까. 뇌과학적인 측면에서도 이제 ‘당신은 이런 사람’, ‘나는 이런 사람’하고 평가를 내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를 ‘어떤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은 바쁜 세상에서 시급히 상대방의 정체성을 규정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우리의 편의 때문이다.
캐나다 구스가 눈뜨자 마자 엄마를 만나야 하듯이 인간들도 적절한 때에 적절한 애정에 노출되어야 한다. 하지만 성장기가 유난히 길다 보니 사정이 여의치 않다. 그래서 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마비된 뇌기능을 가지며 산다. 감정이입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동정심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혹은 왜곡된 경험이 뇌리에 박혀 트라우마를 품은 채로 살기도 한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45년이 지난 지금 문득 들여다보면 온통 모순된 정체성에다가 정서적으로도 마비되거나 왜곡된 것들 투성이다. 일관되지 않은 인격에다가 아내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이런 실존적인 모습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돈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다. 20년을 같이 산 부부조차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는데 남들과는 오죽 하겠는가. 자신의 상처가 가장 크고 자신이 가장 억울한 상황에서는 서로 소통이 불가능하고 불화와 갈등은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만 같다.
걍 외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 같아서 절망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통해서 이런 벼랑에 직면했을 때 ‘점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를들면 소통이 불가능하고 불화와 갈등이 당연한 상황에서, 화해하기는 죽도록 싫은 심정이지만 그냥 생각 없이 손을 쓱 잡는 식이다. 그의 철학을 내 맘대로 해석하자면 그렇다.
과학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인간의 모든 본질이 마치 대뇌피질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의 모든 사고, 의식, 감정, 학습, 기억에 따른 ‘자아’라는 개념은 뇌세포 활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상 생활을 하는 내게 이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싶다. 어차피 지금의 나는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의 에너지와 함께 40년 이상을 겪어오는 동안 이미 어떤 삶이 형성 되어버렸다. ‘삶’은 뇌세포를 기반으로 하지만 이미 그것을 초월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여보, 당신은 ‘나’라고 할 때 몸의 어디를 가리켜?”
뜬금없는 질문에 아내가 손가락으로 이마 한가운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기” 하며 오른손바닥을 자기 가슴 위에 대었을 때 왠지 좀 뭉클했다. 다행이다. 대뇌피질과 사는 게 아니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