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땅에 막대기를 꽂기만 해도 잎이 피어난다는 오월에 우리는 결혼했다. 전날 밤이 되어서야 다음 날이 바로 결혼 기념일이라는 것을, 아내의 귀띔으로 알게 되었다. 뭔가 기억에 남을 방법으로 이 날을 축하하고 싶었지만 결국 낮에 베트남 쌀 국수를 같이 먹고 밤에는 가족과 케이크에 촛불을 켜는 것으로 잔치는 시시하게 끝이 났다. 바쁜 일상에 로맨스는 의문의 1패를 당하고 말았다.
아득하게 젊었던 그 날, 사랑을 믿지 않았던 그 메마른 마음에 어떻게 사랑은 시작되었던 것일까?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처음 만난 날 헤어질 무렵에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흔히 알려진 대로 만난 지 3분 안에 운명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아내의 경우에는 그 다음 날 아침 무렵 다시 만났을 때 마음이 정해졌다고 한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사랑은 마치 작은 씨앗이 땅에 떨어지듯이 서로에 대한 아주 작은 이해만으로 시작할 수 있나 보다.
남녀가 처음 만날 때는 서로에 대해서 미리 충분히 다 알고 만남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다. 대략 5% 정도의 이해와 51%의 육감으로 시작하고 결혼은 30% 정도의 이해와 역시 51% 정도만의 확신으로 결심한다. 그래서 사랑과 결혼은 이성적으로 보면 상대방에 대해 나머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51%의 확률로 저지르는, 일종의 베팅이다. 그렇지만 그 무모한 모험을 시작하기에 충분한 연료가 심장에서 타오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방의 나머지 70%에 대해서 점점 이해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그 아슬아슬했던 51%의 육감이 틀렸음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고 보면 사랑과 결혼의 성공에는 49%의 호의적인 운이 필요한 셈이다.
사랑을 시작할 때 최소한의 확신 구실을 하는 그 육감에 걸림돌이 되는 것, 혹은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어쩌면 젊은 날의 싱싱한 생식 계통의 기관이 펑펑 내뿜는 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 인간 육체에 부여한 번식 본능이 마음에 교묘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대개의 남자는 자연이 주는 그 충동에 몰려서 그 시기에는 치마만 둘러도 사랑에 빠진다. 외로움은 굶주림과 같아서, 극도로 굶주리면 정신이 혼미하여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듯이 극도로 외로우면 지금 만나는 여자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종종 빠진다.
대신 그 육감에 성공 확률을 좀 높일 수 있는 요령이 한가지 있다.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동원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특히 남자들은 시각적인 감각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자료의 비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시각 때문에 오판하지 않으려면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남자들의 마음은 전체적인 맥락과 상관없이 예쁘게 ‘보이는 것’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몰리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는 특별한 유전적 약점이 시각적 본능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어릴 때 선생님이 펼치는 책에서 친구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숫자를 읽지 못하면서부터 스스로 ‘색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내가 보는 세상의 색채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나아가, 강아지들이 보는 세상은 심지어 흑백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보이는 것은 사물의 진짜 모습이 아닐 수 있다. 오감을 의심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시각보다는 그래도 청각이 더 미더웠다. 점점 사람을 대할 때 음성이나 음색, 언어습관을 더 살피게 되었다. 거기서 오는 느낌에 따라 판단하면 더 성공적인 판별을 가져왔다. 아무리 잘 생기고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목소리 음색이 귀에 거슬리면 무의식의 밑바닥이 불편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어떤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성을 사귈 때는 이런 무의식적인 면을 고려해야 한다. 낮에 만난 미모에 현혹되지 말고 밤에 눈을 감은 뒤 고요한 가운데 그 음성을 떠올려 보면 마음이 편안한지, 설레는지, 불편한지, 거슬리는지 살필 수 있고 내 무의식과의 궁합을 짐작할 수 있다.
신과의 사랑도 어쩌면 이성과의 만남과 비슷할 수 있다. 세상에 알려진 모든 과학지식을 동원해서 신을 100% 파악 한 후에 그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가능하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아주 미미한 지식과 51% 정도의 확신만으로도 훌륭하게 시작할 수 있다. 알려진 많은 과학과 가설들, 그리고 세상에 퍼진 수많은 실존적 고통들 때문에 얼핏 신은 나약한 심성의 인간이 꾸며낸 허구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요한 밤에 잠잠한 가운데 내 인생의 의미에 무슨 메세지를 남기는지 그 느낌을 듣는다면 좀 더 판단이 쉬울 것이다.
사랑과 신앙은 일단 51%의 확신으로 시작하더라도 49%는 오류로 빠질 위험을 늘 가지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데이터와 지식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종의 모험, 키에르케고르의 용어를 빌자면 막다른 길에서의 ‘점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아예 보이지 않아서 시각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확률이 더 높을 수도 있다.
아내를 잘 알지 못한 채 결혼이라는 무모한 ‘점프’를 했지만 운 좋게도 아직 오류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어서 기쁘다. 오월이라는 계절처럼 사랑은 생명으로 약동한다. 보이지도 않는 신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쩌면 삶이 생명으로 약동하고 싶음 마음 때문일 것이다. 문득 내가 믿는 것을 이해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