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침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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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내성적이고 말 수가 적은 유년 시절을 지냈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의 놀라운 복제(?)능력 덕분이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평생 모아 봐도 5분이 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버지도 말씀이 없으셨다. 논이나 밭에서 같이 몇 시간 동안 일을 할 때면 내내 서로 묵묵히 소처럼 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라면서 조용한 것이 너무도 익숙해져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외로움과 고립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말 수가 적고 말 주변이 없다는 것이 상당한 장애요인이었고 마치 극복해야 할 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루 빨리 치료를 받아서 병이 낫고 싶었다. 침묵이 미덕이요 오히려 당연한 삶의 방식인 사회가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다면 그 세월을 좀 더 떳떳하게 살았을 것이다.

프랑스의 알프스 샤르트뢰즈 산맥 정상에 있는 카르투시오 수도원이 그런 곳이다.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지만 필립 그로닝이라는 사람은 16년간의 노력 끝에 수도원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서 오직 혼자 촬영하고 녹음하여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고 2005년 세상에 내 놓았다. 바깥 세상에 수도사들의 일상이 공개되었다. 영화에는 나래이션이 없고 오직 수도 생활의 영상과 소리만 있다.

수도원에 입회하자 마자 모두가 머리를 깎는다. 머리카락은 패션, 그래서 허영과 관련이 있고 세속적 삶을 상징한다. 그래서 대체로 동서고금의 수도자들은 머리카락을 밀거나 덮는다. 깊은 산속, 삭발한 머리, 묵언수행… 얼핏 불교 승려들의 삶을 연상시킨다. 복장도 가구도 생활도 최소한의 것으로 유지한다. 고시원 같은 단칸 독방에는 무릎 꿇고 기도하기 좋은 어느 가구, 나무 침대, 그리고 장작 난로만이 소박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고독과 침묵의 기나긴 시간이 시작된다.

침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정적 가운데 들린다. 눈이 쌓이는 소리, 옷자락이 복도와 계단을 스치는 소리, 하루 세 번의 종소리, 성경책 넘기는 소리, 작업대에서 가위로 천을 자르는 소리, 작은 기침 소리, 창 밖 고드름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영화는 구약시대 북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인 엘리야의 일화로 시작된다. 엘리야는 권력자에게 쫓겨 광야를 지나고 어느 산에 도착하여 동굴에 숨었다.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열왕기 상권 19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루해서 어떻게 견딜까? 무엇이 이들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것일까?

MIT를 졸업하고 하버드 MBA를 마친 후 그곳 교수진에 의해 특채될 정도로 똑똑했던 유태인 교수가 있었다. 그는 이른 나이에 많은 사람들이 얻으려 애쓰는 명예와 성공을 이루었지만 내면은 절망에 시달렸다. 50억년 전쯤에 화학적 우연으로 아무 목적도 없이 생기기 시작한 우주, 그리고 어쩌다가 우연한 계기로 단세포가 생기고,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식물, 물고기, 짐승, 사람이 만들어 졌고 사람은 그저 진화의 정점일 뿐, 어느 단계인지 더 어디로 향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보통 사람은 그래도 살아가지만 그는 절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신비한 경험을 하였다. 마치 발레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커튼에 가려져 있던 무대가, 공연이 시작되자 마자 관객석이 어두워지고 무대에 불이 켜지면서 가려졌던 커튼을 투과하여 밝은 무대 안의 모든 움직임이 생생하게 보이는 것처럼, 일상의 세상에서 한 순간 저 너머의 세상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어떤 존재와 대화를 하였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부귀와 공명을 쫓으며 살아갈 수 없는 법이다. 그가 여러 조언을 구한 결과 찾게 된 곳이 바로 프랑스에 있는 카르투시오 수도원이다. 그는 여기서 몇 년 동안 생활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 정도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견디기 힘든 환경일 테다. 구글도, 유투브도, 연속극도 없는 곳에서 자녀들 때문에 생기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스트레스도 없다면 아무리 유년 시절 침묵에 단련된 사람이라도 견디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도 영화 중간 중간에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말없이 화면을 응시하는 수도사들의 눈빛은 너무나도 평온하다.

거룩함이란 이 세상에 몸 담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무언가에 대해서 일컫는 말이다. 이 세상이 전부라면 이 수도자들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면 이들처럼 거룩한 사람들도 없어 보인다.

영화를 보다가 반을 넘기지 못했다. 침묵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무겁다.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주책없이, 나도 혹시나 그 교수처럼 이상한 환시를 겪을 까봐 괜스레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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