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구약 성경에 흥미로운 일화가 눈에 띄었다. 바로 ‘오난’의 죽음이다.
야곱(aka 이스라엘)은 12명의 남자 아들을 두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12부족의 시조가 된다. 그 중에 넷째 아들이 ‘유다’(유대인의 어원)이고 ‘오난’은 바로 유다의 둘째 아들이다. 당시 유목 부족사회에서는 레비라트(levirate)라는 혼인 관습이 있었는데, 남편이 일찍 죽을 경우 그 형제와 재혼하는 관행이었다. 이를 통해서 청상과부는 경제적으로 보살핌을 받고 또한 죽은 남편의 후손을 이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난의 형은 단명하였으므로 아버지 유다는 오난에게 형수를 맡겨 형의 후사를 두게 하였다. 시동생의 책임을 다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오난은 형수를 통해 후사를 둔다 하더라도 자신의 후손이 되지도 못하고 남 좋은(?) 일만 하게 된다고 생각하고는 잠자리만 같이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씨를 땅바닥에 뿌려버렸다. 당시 도덕적 관점으로는 참으로 못된 심보였다. 자손과 가축의 수야말로 번영과 축복의 척도로 여겨지는 시대에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을 돌보아야 되는 부담을 피하려고 꼼수를 부린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행위를 악하게 본 신이 그를 죽게 한다. 당시 사회에서의 권선징악, 사필귀정이랄까.
오난이 죽은 것은 형수를 떠맡지 않아서가 아니다. 당시 법으로는, 만약 동생이 형수를 부양하는것을 거부할 경우 그 부도덕의 대가로 형수는 공공장소에서 슬리퍼로 시동생의 뺨을 때리고 또 얼굴에 침을 뱉은 다음 모욕을 주었다. 죽을 정도의 죄는 아니었던 것이다. 오난이 죽은 것은 사실 형수를 책임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피임이라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유래한 ‘오나니즘’은 오늘날 피임, 산아제한, 가족계획, 심지어는 자위행위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유대인에게는 생명의 씨앗이 가진 원래의 목적(자녀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가로막는 행위를 단죄하는 전통이 생겼다. 그들에게는 자연이 부여한 몸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그처럼 중요했던 것이다.
생명(life)은 신성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운의 정도는 차이가 있었다. 유목생활을 했던 그들과 늘 함께한 것이 ‘성막(거룩한 텐트)’이라는 신의 거처인데, 이 장소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가장 깊숙한 곳은 가장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장소였다. 나중에 솔로몬은 이를 본떠서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생명이 조금이라도 약해지게 되는 행위를 한 사람은 누구라도 특별한 의식을 거쳐서 정결해지지 않으면 장막(나중에 성전)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생명에 빛을 약하게 하는 인간의 행위가 몇몇 있었는데 바로 월경과 출산(엄청난 피 곧 생명을 흘린다), 성행위(단 하나를 제외한 모든 생명의 씨앗이 죽는다), 시체 접촉 등이다. 얀센병에 걸리면 본의는 아니지만 역시 몸이 지닌 생명의 빛이 어두워진다. 이들은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생명의 기운이 약해졌기 때문에 ‘부정’을 탔고 그래서 다시 기운을 회복해야 완벽한 생명의 거처인 성지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난이 죽은 뒤로 몇 천 년이 흘렀다. 피임이 생명의 신성함에 위배된다는 생각은 아직도 가톨릭을 포함하여 몇몇 종교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피임이 아무런 제한 없이 만연한다면 성 문화가 절제를 모르고 자유로워질 것이고 결혼과 가족 중심의 가치관은 당연히 훼손될 것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북미 기준으로 스스로 가톨릭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2/3 이상이 피임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가톨릭 교회는 아직까지도 여성의 생리 주기를 이용한 자연피임만을 고집하고 있다. 가톨릭이 현실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지, 현실이 가톨릭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오래 전 유목민의 삶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주위를 돌아보면 이미 성은 돌이킬 수 없이 개방되고 자유로워졌다. 놀라운 변화이다. 부부들에게 있어서도 삶의 질은 아이를 원할 때 원하는 만큼만 가질 수 있는 관리능력에 달려 있다. 원치 않는 아이가 생겼을 경우에는 낙태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범죄적인 상황에서 임신했을 경우, 혹은 태중의 아이에게 이상 징후가 있을 경우에 낙태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여성에게 중요한 인권 중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의 자유와 ‘나’의 인권을 외치는 도시인들을 피하여, 남성의 씨앗을 땅바닥에 뿌리거나, 월경으로 피를 많이 흘리는 것 조차 죄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생명을 신성하게 여겼던 마음은 점점 현실에 밀려 밀림 속으로 도망간다. 뱃속의 태아는 이제 Human으로 존중 받지 못하고 ‘Potential’ human’으로 대접받는다. 오바마 정부는 피임과 낙태와 관련된 의료행위를 의료보험으로 지원받을 수 있게 하는 법을 진행했다고 하니, 생명을 인위적으로 관리하려는 경향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가 보다.
혼인과 생명의 신성함을 훼손하지 않을 좋은 방법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