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이들을 학교로 라이드하면서 인명사고를 낼 뻔했다. 교차로에서 좌회전 파란 화살표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맨 오른쪽 차선을 가던 나는 그대로 가서 바로 우회전 하려 했다. 그런데 왼쪽 차선에 서있던 차들 너머에서 보행자가 건널목을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간발의 차로 그 사람을 스쳤다. 아침부터 십년감수했다. 어떻게 좌회전 파란 화살표와 흰 보행자 신호가 동시에 겹치는 순간이 있는지 아직까지 어리둥절하다. 하여간, 교차로에서 우회전할 때는 법규대로 무조건 일단 3초 정지하는 것이 최선임을 다시 깨우쳤다.
운전 경력이 오래되어도 운전 상식과 상황 판단에는 향상이 더디다. 그래도, 경험치가 하나 둘 이렇게 쌓이다 보면 이전보다는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은 든다. ‘구력’이라는 것이 어디 가겠는가! 작은 취미 활동마저도 처음에는 실력이 보잘것없지만 오랜 세월 몸담다 보면 조금씩이나마 이전보다 나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 대부분의 분야에서 쌓이는 이 ‘구력’이 종교활동에서는 왜 잘 쌓이지 않는 것일까?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 ‘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착하지 않은가요?’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에 별반 차이가 없다면 그 ‘처방’이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인데, 굳이 그 처방에 계속 기댈 필요가 있을까? 또 시간이 지날수록 ‘구력’이 생기는 것을 보고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10년을 다니건 30년을 다니건 그 열매가 비슷하다면, 굳이 그 나무에 매달려있을 필요가 있을까?
카톨릭에서 미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성체’를 먹기 때문이다. 성체는 말하자면 영적인 몸이 마시는 ‘보약’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로 인해 영혼은 (치명상을 제외하고) 상당히 치유되고, 각종 바이러스로부터 면역작용을 하여 튼튼하게 영적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슬픔의 골짜기를 지나고 사막을 건너는 나그네의 영혼에 성체는 물과 식량의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성체를 많이 모신 사람일수록 더 인격적으로 성숙할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다. 그 중에도 특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체를 모셔온 사람들의 영적인 몸은 그야말로 식스팩으로 미끈하게 단련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아무래도 기대와 어긋나는 구석이 많다.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이유는, (개신교 관점은 잘 모르지만) 사실 이사람과 저사람의 경계가 모호해서 애초에 울타리 자체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잃어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신앙을 갖지 않고 있지만 그쪽으로 기울고 있는 사람도 있다. 또 한가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객관적인’ 구력이 없는 이유는, 신앙이라는 것은 신과 나 단 둘 사이의 아주 ‘주관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2불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은 70불을 가지고 있다면, 70불 가진 사람은 2불 가진 사람을 무시할 수 있겠지만, 사실 70불 가진 사람은 애초 100불을 가지고 있다가 30불을 잃은 사람일 수 있고 2불 가진 사람은 애초 1불 밖에 없던 사람인데 자기 가진 것을 배로 늘인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 각자 가졌던 100불과 1불은 어차피 각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므로, 결국 주어진 것을 까먹은 사람보다 배로 늘인 사람이 더 칭찬 받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 중에서, 심지어 신부님과 목사님 중에서조차 2불 밖에 없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사람의 열매가 2불이라는 ‘판단이나 측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교만스럽기 짝이 없지만… 판단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살겠는가? 하지만 사람에 대한 ‘심판’만은 내 몫이 아니다.
C.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어떤 치약이 좋은 제품이라면 그것을 사용했을 때 같은 조건의 다른 사람보다 이빨이 더 좋아지거나, 사용하기 이전의 자기 이빨보다 상태가 더 좋아져야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오래 한다고 할 때 만약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좋은 효과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사실, 치약을 사용해 온 내 이빨이, 치약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아프리카 어떤 흑인의 이빨보다 튼튼하지 못하다 해서 그 치약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렇듯, 어떤 신자 A 할머니가 더럽고 치사하고 심술 굿은 사람이고, B 교수님은 신자도 아닌데 성품 좋고 교양 있다 해서 할머니의 신앙 자체가 효과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A할머니가 그 전에는 어떠했었고 B교수님은 만약 믿게 된다면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뭐, 다른 사람의 ‘구력’에 대해서 이제 왈가왈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내 이빨은 왜 이렇게 취약해서 아직까지 누렇고 충치가 많은가 하는 것이다. 또, 2불짜리 운전실력으로 길에서 다시 이사람 저사람을 치고 다니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