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희생에 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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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조상들은 신에게 제물을 바쳐왔다. 오늘 날에 와서는 미개한 행위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시대의 문맥 속으로 들어간다면 나름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대교에서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ritualized self-offering’, 즉 어떤 예식을 통해서 바로 자기자신을 바치는 행위이다. 그 예식 안에서 짐승과 자신은 동일시 되어서 그 짐승이 피흘리고 죽음으로써 곧 자기자신이 피흘리고 죽는 것이 된다. 이러한 ‘하나됨(communion)’은 그 짐승을 먹음으로써 절정에 이른다. 한편 짐승을 잡아 통째로 불태워서 연기로 살라 하늘로 올리기도 했는데, 이는 곧 자기자신의 희생이 변모를 거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했다. 연기는 물질적인 존재가 비물질적인 존재로 변화함을 상징한다. 결국 짐승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건지고 신과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희생제물로 바치는 짐승은 지상의 복락을 위해 신에게 바치는 ‘뇌물’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바치는 초월적인 의미가 있었다.

희생(sacrifice)이라고 하면 자기 자신의 것을 대가 없이 내어준다는 말이다. 그것이 물질일수도, 시간일수도, 노력일수도, 혹은 감정일수도 있다. 그런데 내어주는 행위로 인해 자기에게 혜택이 조금은 돌아오는 그런 부분적인 희생이 있는가 하면, 자기에게 전혀 어떠한 이익도 돌아오지 않는 ‘홀로코스트’ 같은 희생도 있다. 밖에서 일을 한다든지, 저녁을 준비한다든지, 집안 청소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분명 헌신적이기는 하지만, 일정 정도는 자신도 혜택을 입는 부분이 있다. 가끔 자기에게 돌아오는 혜택이 눈꼽 만큼도 없음에도 자신을 희생할 상황에 몰리는 수가 종종 있는데, 이 때에 그것을 무의미한 고통이라고 느끼면 종종 분노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뭔가 신적인 삶에 참여하여 ‘은밀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희생은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이고 ‘의지적 결단’의 요소가 강하다. 다음은 C S Lewis의 ‘Mere Christianity’의 일부를 편집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사랑을 ‘덕성’이라고 하는 이유도 의지적인 요소 때문이다. ‘자기애’라는 것이 결국에는 자신의 온갖 혐오스러운 점과 온갖 흠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탈출하고 향상되기를 바라는 것이듯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 이웃이 아무리 혐오스러운 사람이라도 결국에는 어떻게든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좋아한다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좋아한다는 것은 죄도 덕목도 아니다. 그저 ‘사실’이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것’이 ‘사랑’하도록 이끄는 경우가 많아서, 마치 건강을 위해 운동이나 식이요법을 권장하는 것처럼, 종종 이웃에게 최대한 애정을 가지도록 권장하기도 한다. 한편, ‘좋아함’이 ‘사랑’을 망치는 경우도 있다. 우쭈쭈 하는 엄마가 자녀의 인성을 결국에는 망치게 될 때 그렇다.

성격이 차갑다고 사랑하지 못하는가? 사랑은 애정의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소화불량이 죄스럽고 덕스럽고가 없듯이 성정이 차갑다고 해서 죄스러운 것은 아니다. 냉정한 이들도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는가? 룰은 심플하다. 이웃을 실제로 ‘사랑’하는지 고민하지 말고 ‘사랑하는 듯이’ 행하라. 실로 인생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사랑하는 듯이 행동할 때 실제로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번 방향을 바꾸면 좀 덜 싫어하게 된다. 단, 상대에게 우월해 보이려고(봐라, 난 이렇게 좋은 사람이야), 빚을 지우려고, 아니면 ‘감사’를 받으려고 베푼다면 역효과가 난다.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위선은 금방 들킨다. 이렇게 방향을 바꾸다 보면 조금씩 더 사랑하게 되고 조금씩 덜 미워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의지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감정적인 ‘애정’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보통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고, 의지적으로 사랑하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다르다. 그러다가, 도저히 좋아할 수 있을 거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조차 점점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정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다. 만약 싫은 사람에게 내가 상처를 한번 줄 경우에 오히려 그 사람을 더 싫어하게 된다. 즉, 미워했던 사람에게 가해를 가하면 그를 더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사람들이 처음부터 그토록 유대인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더 잔인하게 대할수록 그 사람을 더 미워하게 되고, 더 미워하면 더 잔인하게 대하는 순환에 빠지게 된다.
선과 악은 복리이자로 불어나므로 그래서 매일매일 행하는 작은 선택이 중요하다. 오늘 작지만 좋은 선택을 한 것이, 전쟁으로 치면, 몇 달 뒤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승리를 가져오는 교두보가 될 수 있다. 오늘 낸 ‘화’나 ‘짜증’이나 ‘탐닉’이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결국 전쟁에서 중요한 다리 초입을 잃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그 다리로 적이 침입해 공격해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낭패를 겪게 될 수 있다.>

그리스어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다섯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것을 제물로 바치는 듯한 희생의 습관을 통해 ‘습득’되는 뭔가 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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