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 소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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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영사관에 가져갈 서류를 준비하다가 오래 전에 나에게서 받은 손 편지를 발견하고는 키득거렸다. 줄줄이 손발 오그라드는 내용이다. 어쩌다가 막내 손에 들어가 하루 종일 놀림감이 되었다. 날짜가 없어서 연애 때 보낸 편지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결혼 초기에 건네 준 글이었다. 낚시가 끝났는데도 이처럼 낯뜨거운 고백을 하다니 무슨 심정이었을까? 그 때 마음과 지금은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은 세월을 겪으면서 모양이 조금씩 변해간다. 과거에 나는 늘 스스로의 감정에 자신 없어했다. 변덕스러운 것이 사람 마음이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순간조차도 그것이 내 진심인지 100% 확신이 없었다. 설레는 마음이 모두 고귀하거나 지고지순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에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사랑한다’하고 고백하는 것은 일종의 필요(?) 때문일 것이다. 입으로 말하는 순간 애매하던 감정이 구체화 되기도 하고 결단의 의미가 되기도 하며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는 면도 있어서, 고백은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에 중요한 전환을 가져온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나에게 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국면에 이르면 비록 100% 확신 없이도 일단 고백하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필요를 느끼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감정의 진정성에 대해 다소 불안해하기도 했다.

이제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꼭 100% 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어쩌면 51% 이상의 확신만 있어도 모험을 해봐도 괜찮을 것이다. 반반의 상황에서 1%의 무게는, 한 방향으로 기울게 하여 결국 모든 것이 그쪽으로 쏟아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시작은 대개 감성의 충만함으로 출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애매한 순간마다 내리는 ‘결단’들이 오히려 사랑의 열매를 익어가게 한다.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신비롭게 시작하지만 그것을 지속하게 하는 것은 ‘의지’의 힘이지 싶다. 달콤한 시기가 지나서 그 모양이 다른 맛으로 변할 때에도 나무와 같은 하나의 생명체로 대하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처음의 달콤함만이 사랑이라 생각하면 그 맛이 사라졌을 때는 늘 갈아타고 싶어한다.

토론토 처가에서 지내다가 아내의 꼬맹이 시절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니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다. 영혼이라는 무한한 존재가 저런 유한함 속에 있다가 지금은 또 다른 유한함 속에 있다. 생물학을 모르는 사람이 애벌레와 나비, 올챙이와 개구리를 보았다면 아마 각자 다른 생물들이라고 생각하듯이, 어린 시절과 지금 40대의 모습을 따로 보면 마치 각자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 동일한 존재가 물고기 비슷한 모양을 한 태아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전에는 두뇌나 심장과 팔 다리가 다만 잠재적으로만 있는 수정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연약한 유한 속에 무한의 존재가 담겨있다니 참으로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정 시기 이전의 태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은 오싹한 판단착오가 아닐까?

예전 ‘인생극장’에서는 엇갈리는 선택에 따라 각각 다르게 펼쳐지는 두 갈래 인생을 보여주곤 했다. 현세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하나의 삶만을 경험할 수밖에 없어서 다른 선택이 어떠했으리라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의 두 가지 결과를 나란히 동시에 바라보게 되는 이상한 날이 오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이 사라지는 날이 오면 무수한 것들을 한꺼번에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어쩌면 우리가 다행이라 생각했던 것이 불행으로, 그리고 극심했던 고통이 어쩌면 위대한 위대한 축복으로 드러날 지도 모른다.

누군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는 보고자 할 때는 볼 수 있고 그냥 있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을정도의 빛만 주어졌다고 했다. 진실을 보는 것은 그래서 IQ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일 것이다. 50%의 마음에 의지적으로 1%를 더하여 한쪽 방향으로 계속 기울도록 애쓰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만약 천사가 우리의 길을 비추고 인도한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에게 100%의 축복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단 1%의 무게를 가진 씨앗을 우리 마음 속에 넣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나무를 계속 자라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몫이다.

젊은 마음 속에 들어오는 달콤함이 혹시 번식을 하고자 하는 동물적 본능이나 혹은 생리 호르몬의 화학작용이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것은 아닐까 의심하며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주저했었다. 그러나, 사랑은 감성이라는 밭에 금새 열리는 열매가 아니라 그냥 계속 자라며 변하는 나무인가 보다. 그러니 이제 51%의 확신만 있으면 ‘사랑한다’하고 말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어떤 유한한 모습에 담겨 있더라도 변함없이 그쪽을 지향할 것이라는 결심만 선다면.

나의 나무가 지금은 어떻게 자라고 있을까? 이 다음에 모든 선택의 결과들을 동시에 바라보는 날이 오더라도 불행과 후회에 휩싸이지 않도록 지금 이순간 좋은 1%의 힘으로 마음이 한 방향으로 기울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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