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하다가 오른쪽 무릎에 다시 무리가 왔다. 절뚝거리느라 생활이 불편하고 바깥출입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나에게 라이드를 부탁하지 않고 집으로 걸어와 주었고 아내도 여기저기 운전을 대신 해주었다. 모처럼 호사를 누렸지만 갑자기 늘어난 시간이 어째 익숙하지 않다. 겨울 내내 묻은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는 차 안 카페트를 청소했다. 그리고 나서 방 하나를 또 정리했다. 낡은 이층 침대를 분리해서 지하에 옮겨 놓고 새 침대를 올려 놓았다. 테이블도 마련하고 의자도 갖다 놓고 바닥청소도 했더니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던 방이 아늑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나만의 공간으로 삼을까 하다가 막내에게 보여주었다. 막내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엄마랑 한 침대에서 잤었다. 이제부터 그 방을 사용하겠다고 결심해준 막내 덕분에 우리 부부는 다시 같은 침대를 쓰게 되었다. 그런데 … 다시 무릎이 아파온다.
크건 작건 아프면 가까이 있는 가족들에게 민폐이다. 어릴 때 할머니, 엄마, 작은 형은 한참이나 아팠었다. 병은 그 자체로도 고통이지만 가족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전해지니 투병 생활이 오래다 보면 아무래도 모두가 피폐해진다. 본인과 가족 모두의 생명력을 천천히 갉아 먹게 된다. 그래서 애써 피하고 싶은 것이 바로 지병이다.
본인이 아플수록 오히려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가능하면 얼마나 다행스러울까? 인어는 눈물을 흘릴 때 그 방울이 진주로 변한다고 한다. 내 병고가 보석으로 변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동화 같은 일을 꿈꾸어 본다. 혹시 지금 내가 이렇게 무탈하고 오히려 행복하기까지 한 것은 어쩌면 예전에 어머니와 작은 형이 그 만큼 아파한 덕택이 아닐까?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서, 사람이 좋은 행실을 하면 그만큼 보상해주고 그 복을 여기저기 배분해주고 있다고 상상해본다.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좋은 일을 했을 때 그 공로가 나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은밀히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하기 싫은 설거지를 마음 다잡아서 하거나, 식료품 사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식구들의 먹을거리를 준비하거나, 하기 싫은 공부를 참아가며 몇 페이지 했을 때, 하늘에서 나를 사랑하며 지켜보는 아버지 같은 존재가 있다면 분명 ‘참 잘했어요’ 하고 칭찬하며 스티커라도 붙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혹은 염려스러워 하는 사람에게 그 스티커를 양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내가 고통을 겪어낸다고 해서 그 열매를 남에게 돌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고통과 죽음만큼 개인적인 일도 없다. 그렇게 외롭고 무의미하게 신음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이것을 남에게 희생제물 비슷하게 내어주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하긴,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는 그로인해 공양미 300석을 아버지에게 마련해주고 결국 아버지 눈도 뜨게 하였다. 오늘 내가 아픈 이 무릎을 심청이처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남몰래 겪어낸다면 얼마나 환상적이고 멋진 일이 될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은 이미 낡은지 오래다.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11차원 세계까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리적인 세계마저 11차원까지 가능하다면 그 너머에 생각지도 못한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 보이지 않는 세계는 지금 살고 있는 세상과 서로 밀접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 세상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와 일대일로 대응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나의 동작, 행위, 생각 하나 하나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작용하여 커다란 파급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보이는 나의 작은 행위가 보이지 않는 영적인 보물을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 보물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는 보물이다.
고통도 선행만큼이나 남들에게 좋은 열매를 줄 수 있는 통로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실제로 미국에서 어떤 투병 중에 있던 사람이 친구에게 부탁해서 자기 공동체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구했다. 그리고 자기가 아픈 한 시간은 A씨를 위해, 그리고 또 다른 한 시간은 B씨에게 등등, 마치 선물을 주듯이 계획표를 짰다고 한다.
어차피 영적인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유명한 무신론자 버트런드 러셀에게 한 친구가 물었다. 그러다 죽었을 때 진짜 하느님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러셀은 ‘당신이 나에게 충분한 증거를 주지 않았지 않소.’ 하고 당당하게 말하겠다고 했다. 동의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 다만 불충분한 증거에도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논리적인 ‘도약’을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한계에서 멈출 것인지를 선택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지는 크고 작은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을 믿어보기로 작정했다.
역사의 어느 순간에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그 때에도 그 이후에도 우리가 겪는 고통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무의미하게 겪고 있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 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살아남지 못한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육체가 건장한지 아닌지가 아니라 자기가 겪는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는지 못하는지의 차이였다고 어느 심리학자는 발표했다. 가장 지독하고 끔찍한 고통과 죽음으로 인해 가장 심오한 복락이 인류에게 도래하게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믿는다면, 그 사건과 신비롭게 연결된 나라는 존재가 겪어내는 작은 고통도 어쩌면 남에게 자그마한 도움이나마 줄 수 있으리라 한번 믿어본다.
지금의 무릎보다 꽤 심각한 고통에 직면해서도 이런 생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이 작은 아픔을 조그만 행복으로 바꾸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생각지도 못한 큰 고통을 맞이하더라도 기쁘게 그 열매를 남에게 바치는 행복을 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식구들을 위해 애써 준비하는 일들을 예전처럼 얼굴 찡그리지 않고 좀 더 기쁘게 감내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내게는 당장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