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오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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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뜬금없이 따뜻해진다. 아침 저녁으로 아직 서늘하지만,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옆집 아저씨들은 겨우내 손상된 잔디를 손보느라 부산하다. 뭔가 서투른 일은, 나름 안목이 생길 때까지 요령 좋은 사람들을 따라해야 현명할 것이다. 홈디포에 가서 이것 저것 사서, 파이고 메마른 잔디에 흙을 덮고 비료도 골고루 뿌렸다. 가드닝 회사를 이용하는 것보다 비용이 사분의 일 정도 밖에 들지 않았다. 흡족하다.

문득 보니, 집 역시 여기저기 수선해야 할 곳이 많다. 사실 7년 이상이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해오던 것들이었다. 낯선 땅에 자리잡느라 늘 불안에 시달리며 무언가에 쫓기며 살아오는 동안, 이런 저런 핑계로 외면해왔었다. 이번 봄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집 외관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손상된 부분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아이디어를 생각하느라 홈디포 통로 여기저기에서 몇 시간이나 서성거렸다. 가장 저렴하게 시작할 수 있는 페인트칠부터 해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색깔을 결정하고, 칠할 부분을 닦아내고, 갈라진 틈 여기저기를 메우고, 다시 사포질을 하고 나서야 칠을 하니 꽤 시간이 걸린다. 몇 군데 칠하고 나서 이제 헐렁하던 현관문과 문지방도 고쳤다. 현관 레일도 곳곳이 갈라지고 페인트가 벗겨져 흉했는데 기둥만 남겨두고 모두 뜯어버렸다. 다음 주에는 현관 기둥과 창틀을 좀 현대적인 색으로 칠해 보리라. 백야드 펜스의 부러진 기둥도 갈고, 찌그러진 데크에도 손을 대 보리라.

언제부터인가 예전에 골몰하던 일들이 점점 시들해온다. 그리고 그간 미루던 일들, 관심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되던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오십이 내일 모레다. 뒤를 돌아보는 일이 점점 잦아진다.

최근 아이유가 나오는 드라마 중에, 이선균의 형으로 나오는 사람이 술집에서 동생에게 넋두리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내가 내일 모레면 오십이다, 오십. 놀랍지 않냐? 인간이 반세기 동안 동안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학교 땐 죽으라고 공부를 해도 밤에 누우면 삼시 세끼 밥 챙겨 먹은 기억 밖에 없더니 이게 딱 그 꼬라지야. 죽어라 뭘 하기는 한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게 없어. 아무리 뒤져봐도 없어. 그냥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대한민국은 50년 동안 별 일을 다 겪었는데, 인간 박상훈 내 인생은 50년 동안 먹고 싸고 먹고 싸고.” 그래서, 결론은 식당 하나 차려 보겠다는 황당한 결심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반세기 동안 무엇을 했는지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매달리던 것들이 지금 와서 생각하니 부질없었다는 말이겠지. 먹거리, 볼거리, 게임거리에 열광하고 탐닉하던 내 젊은 시절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냥 ‘먹고 싸고’했던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안타깝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게다. 어리석음은 세대를 거쳐 반복되고 지혜라는 보물은 애초에 상속이 잘 되지 않으니까.

예전에 이름 날리던 가수 중에 김건모가 있다. 듣기는 아름다우나 따라 부르기가 어려운 그의 아름다운 이별 노래는, 밤늦은 시간 친구들과 모여있던 지하 자취방의 천장을 아련하게 떠돌았었다. 그랬던 김건모가 오십이 조금 넘은 미혼으로 ‘미운 우리 새끼’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궁상을 떨고 있다. TV에 보여지는 삶에 얼마만한 진실이 담겼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아내는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어서 좋단다. 그러나 나는 그가 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의 그 놀라웠던 노래들 덕에 먹고 사는 문제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지금 그의 생활은 아무리 이벤트로 가득 채워도 그저 떠도는 먼지처럼 무료해 보이기만 하다. 우리 모두가 동경하는 ‘건물주’ 같은 삶 다음에는 ‘무료함’이라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나 보다.

나이 들어 무료함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젊은 시절에 미리 튼튼하게 영혼의 집을 지어야 한다. 우리는 튼튼하게 구조를 세워야 하는 것들은 자꾸 미루고 오로지 지금 당장 급한 일에만 매달리며 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는 동안 건강을 미루고, 가족관계를 미루고, 영혼을 닦는 일을 미룬다. 그러다, 반세기가 지나 자신을 돌아볼 때 자잘한 수리가 아니라 인생의 구조와 토대가 크게 손상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한다.

오래 살았다고 다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오십’이라는 나이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기 시작하는 터닝포인트가 되는 것 같다. 내 마음의 집은 안녕할까? 헐렁한 곳은 조이고 썩어 갈라진 것은 새것으로 갈아보지만, 먹고 싸기만 하는 동안 기둥이나 기초가 상했다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나이 오십. 모든 것을 삼키려고 달려들던 때는 이제 지났다. 더 이상 앞만 보고 달릴 일도 없다. 상했으면 상한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거기서 멈추고, 이젠 뒤돌아서 손 봐야 할 곳을 살핀다. 시간을 두고 달팽이처럼 천천히 고치자. 다만 기둥이나 기초가 너무 심하게 상하지는 않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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