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액땜과 큰 액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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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가 아팠었다. 나을 때까지 엄마 옆에서 자고 싶다고 해서 잠자리를 내주고 대신에 나는 막내 방에서 이틀 밤을 보냈다. 혼자만의 방을 사용할 때는 자유를 느끼면서도 왠지 새벽잠을 설치게 된다. 막내는 다행히 금방 나았다. 자라는 아이들 몸에는 생명력이 싱싱하게 감돌고 있나 보다. 어른들의 몸은 그렇지 않다. 사오 십 년 동안의 몹쓸 습관이 곳곳에 배어있던 참이라 쉽사리 낳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내가 시름시름 하더니, 나도 이어서 감기를 앓았다. 몸살과 두통이 오고 목이 아프며 기침도 심했다. 몸도 낡은데다가, 아이와 달리 푹 쉴 수가 없는 처지들인지라 둘 다 이번 감기는 의외로 오래 갔다. 그 와중에도 평소 각자 소화하던 일들을 계속 해내어야 했다. 바깥 날씨도 병이 오래가는 데에 한 몫을 했다. 차 안에 있으면 땀을 흘리다가 밖을 나서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대니 바이러스만 신이 났다.

몸이 아픈 것은 어쩌면 지난 세월 동안 몸을 잘못 사용해서 쌓인 부작용을 조정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감기바이러스라고 할지라도 평소에 건강하게 몸을 사용해 왔더라면 충분히 거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저질러온 자잘한 잘못들을 씻김굿 하듯이 고통과 함께 털고 간다. 밖에서 입고 돌아다니던 옷을 잠자리에서도 그대로 입고자기 일쑤고, 속옷을 자주 갈아입지도 않으며, 집 안팎의 일을 할 때 장갑을 잘 끼지 않고, 밤에 이빨 닦는 것을 자주 거르며, 평소 샤워나 머리 감는 것을 귀찮아한다. 내 잘못은 한도 끝도 없다. 몸의 저항력은 이로인해 점점 허물어지다가 결국은 바이러스에게 몸의 성벽이 뚫린다.

아플 때는 마음이 겸손해진다. 아프지 않았으면 바뀌지 않았을 행태들이 신기하게도 몸의 병치레와 마음의 참회를 거치며 지난날의 잘못들을 정화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할 기회가 주어지고 허물어진 성벽이 다시 쌓이면 새 출발선에 서게 된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다. 인생의 길목마다 그래서 저마다 한번씩 앓을 수 밖에 없고, 한번씩 털어내면서 점점 성숙해진다.

행복할 때는 불행할 때를, 불행할 때는 행복할 때를 생각하는 것이 지혜라고 했다. 세상에 일방적인 흐름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혹은 아무리 불행하더라도 항상 그 자리에 머무는 법은 없다. 흐름이 형성되더라도 반드시 주기적으로 숨고르기, 즉 조정국면을 거친다. 평소 건강하던 사람이 며칠 드러누웠다면 그것은 상승의 흐름 중에 잠깐 숨을 고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의 몸은 결국 대세마저 꺾이고 하락하는 흐름을 맞이한다. 그때부터는 늘 여기저기 아픈 와중에 잠깐씩 건강한 날을 맞이한다.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조정을 거치지 않고 죽음이라는 대폭락을 맞이한다. 육신을 가진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이 이러하다.

그러나, 시야를 좀 통크게 넓혀보면 어떨까? 평소 건강하던 중에 겪는 병치레가 고통을 수반하는 작은 조정과정이라면, 몸의 흐름이 꺾이고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대세하락국면도 어쩌면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볼 때 거대한 조정과정의 일부가 아닐까?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간 생명이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들을 조정해서 크게 털고 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는 시나리오이다. 윤회도, 최후의 심판도 다 이런 맥락일 것이다. 삶의 경험으로 볼 때 사람은 그냥 우주의 먼지로 허무하게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직관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고통과 함께 죽음 이후에라도 잘못을 털어내는 그 과정은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섭리’와도 같은 것일 게다. 플라톤 역시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반드시 내세는 있다고 주장했었다.

무엇이 잘못이고 왜 잘못이냐는 데에 우리들은 각자 합의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잘못’을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라고 했다. 질병이 모여 죽음에 이르게 하듯, 잘못이 모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만약,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이 죽음으로써 지난 모든 잘못을 털어내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면, 이런 죽음의 과정은 새 세상에 들어서기 위한 조정 과정이고 고마워해야할 일이다. 다음 세상에서는 거대한 상승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은 무슨 잘못으로 그리된 것인지, 혹은 어린이는 무슨 잘못으로 죽음을 맞이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고통과 죽음으로 치닫는 생명이 그저 먼지로 끝날 무의미한 운명이 아니라면,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가져볼 만할 것이다. 모두에게 저마다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 있고, 그것을 이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모두 채운 다음에서 새로운 대세 상승이 있으리라는 희망. 아무런 참회 없이 기계적으로 누구나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이 육신의 쇠퇴과정을 새로운 도약을 위해 꼭 거쳐야하는 거대한 조정과정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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