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탓인지 어두운 지하 골방으로 내려가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대신 밖에서 이리저리 집을 수리하거나 지인들과 어울려 숯불에 고기를 구워먹는 일이 잦아졌다. 생활을 즐긴다거나 개인적인 취미에 폭 빠지는 것이 점점 덜 죄스러워진다. 평소 못마땅하던 이들을 반찬 삼아 씹는 버릇은 여전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점점 그들도 관심의 테두리에서 멀어진다. 안정을 찾기 위해 애쓰는 이웃들에 대한 미안함도 동시에 희미해진다. 비판이든 염려든 모두 나의 교만 탓은 아니었을까? 지금은 그저 나에게 주어진 현재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언제까지일지는 알 수 없지만……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을 들어왔고 ‘기쁨을 나누면 시기 받고 슬픔을 나누면 배신을 당한다’는 말도 들어왔다. 전자가 더 진실하다는 것을 요즘 와서야 실감한다. 내가 힘들고 외로운 것은 그것을 ‘혼자’ 겪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무슨 일을 겪든 누군가 친구 같은 이가 옆에 말없이 있어주기만 해도 훨씬 수월해진다. 멀리 운전을 해야 하는 귀찮은 일이 생겼을 때 옆에 아내가 앉아있다면, 혹은 영어를 못해서 수치와 모욕을 당할 때 옆에 남편이 있으면 참을 만하다. 그런 이가 없어질 때 젊은이는 쉽게 절망에 휩싸이고 늙은이는 갑자기 늙어간다.
폭설이 내리는 겨울 어느 밤, 이름 모를 시골 길 위에서 차가 고장났다. 안절부절 하며 보험사에 연락하니 구조차가 도착하려면 두세 시간 걸린다고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참담하기만 하다. 흔히 우리는 세시간 뒤에 구조차를 몰고 오는 사람을 나의 구원자로 생각하지만, 진정한 구원자가 있다면 사실 그 사이에 이런 상황에서도 나와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다. 어떤 말도 필요 없이 그 존재를 느끼기만 하면 그 참담함이 반의 반으로 줄어들어 어느새 견딜만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런 ‘절친’은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내 ‘베프’는 10년 이상 한국에 떨어져 있고 아내마저도 시공을 달리하는 때가 더 많다(서로 다른 일에 몰두하다 보면 같은 공간에서마저 각자 다른 시간대를 살게 된다). 맘만 먹으면 애완동물을 늘 데리고 있을 수는 있어서 어느 정도는 위로가 되지만 어느 선에 이르면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나의 영혼을 지켜보는 어떤 초월적인 ‘절친’이 있다고 배웠지만 둘러봐도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늘 그 절친의 존재를 느낄 수만 있다면 삶은 ‘기쁨 반, 슬픔 반’이 아니라 ‘늘 기쁨, 가끔 슬픔’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을 이제 이해한다.
요즘은 나무먼지(saw dust)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지능이 떨어진 느낌이다. 미세먼지는 너무 미세해서 허파에서 혈액에 스미고 머리에까지 올라간다고 하던데, 설마 나무먼지가 그보다 해롭겠나 하고 방심했었다. 그러나 대화 중에 막상 쉬운 단어가 생각나지 않고 잘 알던 사람의 이름이 가물가물 할 때가 많아졌다. 급기야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도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껌딱지처럼 늘 손에서 떠나지 않던 것이 핸드폰, 차 열쇠, 지갑이었는데 이 중에 하나라도 그 소재를 모르는 상황이되면 참으로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혹시나 하고 어제 피자를 사러 갔던 가게에 전화를 했더니 반갑게도 거기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늘 붙어있던 ‘물건’을 잃어버린 상실감 때문에 이처럼 공황상태에 빠진다면 늘 붙어있던 사람을 잃어버린다면 얼마나 더 큰 상실감에 빠질까? 사실 지갑에는 돈이 없었고 운전면허증이라든지 은행카드 헬쓰카드 등은 귀찮을 망정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기르던 애완동물이라면 훨씬 더 마음이 아플 것이고, 배우자나 자녀를 상실한다면 도대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조차 헤아릴 길이 없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내 ‘절친’을 상실한다면?
사실 여부를 알 길이 없지만 하늘에 잠깐 갔다 온 사람의 말에 따르면, 거기서 지상의 자기 인생을 돌아보니 자기도 몰랐던 절친이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며 돌보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온 세상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창조한 듯 모든 일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설계하고 관리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하늘에서 가장 뼈저리게 후회한 것은, 마치 자신이 지상에 혼자 버려진 것으로 생각하고 괴로워하며 인생의 무의미함 때문에 절망한 시간들, 나에게 ‘이런 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저런 일만 내게 일어났더라면’ 하며 한탄 속에 시간을 낭비한 것이었다고도 했다.
만약 이런 존재를 죽고 나서야 알게 되고 곧바로 즉시 상실하게 된다면 그 상실감은 과연 얼마만큼일까? 아마 지갑을 잃어버린 것보다 더 공황상태에 빠질 것은 틀림없고, 어쩌면 배우자나 자식을 상실하는 불행보다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지금 현재의 삶을 즐긴다는 것은 나의 환경과 재화를 즐긴다는 것이라기보다 어쩌면 어떤 불행에서도 내 절친이 늘 함께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낀다는 것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절친이 주어지기를, 혹시 이미 모두에게 주어졌다면 누구나 그 절친을 빨리 죽기 전에 발견하게 되기를 바래본다. 그 첫발은 아마도 그런 절친이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기대, 어쩌면 이 모든 일을 ‘나 혼자’ 겪고 있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