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2901

전화기 너머에서 침착했던 음성이 끝내 떨리고 만다. 사람의 영혼을 뒤흔드는 소식은 손편지로 전해지건 첨단의 스마트폰으로 전해지건 마음을 원초적인 심연에 빠뜨린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나와 함께하고 있는 가족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경상도 아빠여서 그런지 아들과는 늘 데면데면 했었다. 조만간 대학 기숙사로 떠날 예정인 아들과 늦게나마 추억 하나라도 더 쌓아보려고 토론토 테니스대회에 같은 팀으로 참가했다. 우리가 얼마나 더 가까워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노력 한가지는 더 하게 된 셈이다. 딸 아이들과는 아내와 함께 토론토 아일랜드에서 하루를 보냈다. 여기가 이랬었나 싶을 정도로 섬은 그 동안 모습이 바뀌었고 마치 외국의 낯선 대도시에 여행 온 기분이었다. 우리는 돈을 많이 절약한 것 같아서 즐거워했다. 딸은, 훗날이 되면 여기에 언제 왔었던지 그리고 여기서 무엇을 했었던지 기억은 흐려지겠지만 오늘 느낀 햇살의 따스함과 호수의 푸르름과 바람의 시원함은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눈은 볼 수 있는 기능이 있지만 저 앞에서 빛으로 넘실대는 호수가 수정체에 담길 때에 비로소 눈이 존재가치를 발휘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혼이라는 호주머니도 사랑의 추억들이 가득 담길 때에 비로소 존재의 참 가치를 경험한다. 영혼은 그저 생명의 ‘원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에 뭔가 의미있는 내용이 채워지도록 지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이라는 것은 사실 호주머니같이 뭔가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인간의 영혼(soul)은 오히려 영(spirit)의 일종이다. 그래서 영혼에는 ‘부분’이 없다. 부분이 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들어있다는 뜻이고, 여러 부분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뜻이고, 그 결합이 갈라져서 다른 부분과 결합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부분이 있는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육신은 수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져있고 시간과 공간에 속해있어서, 결국 흙 속으로 분해되었다가 다시 양분이 되어 식물과 동물의 부분과 결합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분이 없는 ‘영혼(soul)’은 분해되지 않고 그래서 불멸한다(고 합리적으로 추정된다). (‘영혼은 변하지 않는가’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극히 제한된 계기로 인해 변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부분이 없는 영혼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에 속한 육신과 결합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영혼 따로 육신 따로 일시적으로 결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혼만이 참된 자아이고 육신은 거짓 자아(혹은 허상)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드라마에서 남녀 영혼이 몸을 바꾼다든지, 영혼이 잠깐 비운 사이에 몸이 타버려서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든지, 전생의 사람이 이번 생에는 다른 몸으로 태어난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는 인간을 귀신(영혼)이 사는 집(몸)이라거나, 혹은 물(영혼) 먹은 스펀지(몸)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미약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영혼과 육신의 결합은 ‘달구어진 물’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물에서 굳이 열을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은 단순한 ‘열’이나 ‘에너지’보다 더 고차원적인 존재로 만들어졌음이 틀림없다. ‘열 에너지’조차도 물을 벗어나더라도 없어지지 않고 우주 어딘가에 존재한다면(열역학 제1법칙), 그보다 고차원적인 인간의 영혼 역시 육신을 떠나더라도 계속 존재하리라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열 에너지’는 알지도(knowing) 사랑하지도(loving) 못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몸을 떠나서도 알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존재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영(spirit)의 핵심적인 활동이며 인간의 영혼은 그 영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몸’을 통해 앎과 사랑으로 채워진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그래서 영혼의 핵심활동이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이 활동할 대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떠나간 사람을 더 크게 알 수 없고 더 크게 사랑할 수도 없다. 그리고 제 3자의 어떠한 입도 그렇게 다친 영혼을 위로할 수 없다.

영혼은 보이는 그 어떤 존재보다 더 존재적이지만 감각을 초월하여 있기 때문에, 아무도 살아서 영혼 자체를 직시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블랙홀을 추리를 통해 그 존재를 짐작하였듯이 영혼도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 나아가, 몸을 떠나버린 탓에 더 이상 그 영혼이 내용을 채울 수 없는 상태라 하여도 ‘알고 사랑하는’ 그 기능은 여전히 간직한 채 지상에 남아있는 자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가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토론토 아일랜드에서 아이들은 싱글 자전거를 탔고 나와 아내는 2인용 자전거(tandem)를 탔다. 막내 딸아이와도 2인용 자전거를 같이 타기도 했는데 그때서야 아내와 함께 탔을 때가 얼마나 편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뒷좌석의 아내는 내가 페달을 저을 때와 멈출 때를 기가 막히게 느끼고 거기에 자신의 발을 맞추어 주었다. 그렇게 쭉 한결같이. 마치 내가 자유롭게 페달을 밟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한결 같은 사람일수록 있을 때는 없는 듯하지만 없을 때의 빈자리는 그만큼 더욱 커진다. 나는 아내보다 먼저 죽기를 늘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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