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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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싸늘한 비가 하루 종일 내리고 있다. 공기를 떠돌던 온갖 부유물들도 비에 씻겨 땅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다. 이맘때쯤이면 유독 비가 많이 내리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이 들어서기 전인데 잠시 민들레가 꽃을 피우기도 하고 더위로 시들했던 잔디가 다시 파릇해지기도 한다. 혹 맑게 갠 저녁 무렵이면 낯선 들판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서쪽 하늘 너머로 유난히 짙고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종종 목격한다. 사람의 마음도 계절의 변화에 이끌리는 모양이다. 생각은 자연의 변화를 따라 차분해져 간다. 한동안 가졌던 애착과 집착과 흥분은 잠시 가라앉고 소란한 와중에는 몰랐던 소소한 의미가 때아닌 꽃처럼 피어나고 마음은 잠깐이나마 다시 생기를 회복한다.

옛사람들은 세 가지의 하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비가 내리거나 눈부신 노을이 펼쳐지는, 눈에 보이는 하늘이 그 첫째요, 그 너머로 펼쳐지는 미지의 우주가 그 둘째요, 그것을 다시 초월하여 신이 사는 세계가 그 셋째 하늘이다. 첫째 하늘에서 우리 눈에 펼쳐지는 아름다움과 광할함은 오직 셋째 하늘이라는 보이지 않는 배경에서 이해가 가능한 것이었다. 문맥을 모른다면 아무리 아름답고 장엄한 순간들일지라도 일련의 감각적 현상들이 순서 없이 허무하게 나열되어 지나갈 뿐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배경과 문맥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래도 여자들이 더 탁월한 것 같다. 아내는 한국말이 서투른 둘째 아이와도 기막히게 대화를 잘 나눈다. 둘째의 불완전한 우리말 어휘와 문장을 아내는 어찌 그리 잘 알아듣는지 나는 늘 감탄한다. 여자들의 뇌 구조는 남자들보다 직관력이 더 뛰어나고 아주 작은 실마리로도 전체를 종합해내는 신비한 능력을 발휘한다. 남자들은 소리 나는 음성을 바탕으로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듣는 말이 두서가 없거나 단어가 부적합하게 사용되면 의미를 해독하기 힘들어 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추리하고 계산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밟아야 하므로 상황판단이 느리고 순발력이 둔하다. 갑자기 변화된 환경, 여러 정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환경에서 남자들은 그래서 여자들보다 무능하고 소심해진다. 대신 특정한 분야에 전문성이나 루틴이 형성되고 나면 미련할 정도로 거기에 몰입하는 힘을 발휘하기도 하다. 어쨌든 남자의 일반적인 그런 성향 탓인지 나는 둘째 아이와의 대화가 어렵고 오래가지 못한다. 딸아이와의 관계는 오직 그 아이의 호의 때문에 좋게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있다면 부분적인 뜻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일희일비하는 일도, 뭐 하나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고, 무엇보다 내가 보고 있는(look) 것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새로 발견하게(see) 될 것이다. 사실 문맥을 먼저 알지 못한다면, 즉 내가 보고 있는 부분이 전체 중에서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를 모른다면 도대체 뭔가를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Frank Sheed라는 사람이 예를 든 것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바라볼 때만큼 황홀한 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의 아름다운 눈에 그렇게 경탄했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 찬사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는 자기 눈을 파서 접시에 담아 나에게 선물한다면 어떨까? 눈은 얼굴 안에서 그 자리에 있을 때만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어떤 아름다움도, 그 어떤 의미도, 그 어떤 유용함도 문맥을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 접시에 담긴 눈만을 분석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 눈의 아름다움을 알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접시 위의 눈을 연구한들 소용이 없다.

나를 ‘아는’ 두 사람이 있다고 치자. 한 사람은 저명한 심리학 교수인데 나를 매일 2시간씩 십 년 이상 상담을 하며 연구해왔고 나에 관한 논문도 수십 편을 썼다. 아마도 나에 관해서는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합쳐서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박사님에게 그저 연구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그냥 세상에 둘도 없는 내 친구이다. 허물없이 마음을 터놓으며 그렇게 긴 세월 우정을 쌓아왔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나를 잘 ‘아는’ 사람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큰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있다고 치면, 지난 여름 나는 그 배 안에서 심기가 불편했었다. 승객들과 가축과 다른 짐승들의 소란, 그리고 배 안 여기저기서 똥냄새가 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배에서 뛰어내려 태평양을 헤엄쳐 건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구명정으로 혼자 가는 것이 차라리 깔끔하고 쾌적할 망정 그것을 타고 가다가는 태풍 한번 몰아치면 끝장이다.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배가 나를 위해 태평양을 건너고 있다는 큰 문맥을 놓치면 그 어떤 감사도 의미도 인내심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렴풋한 똥의 기억은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내 입으로 들어간 것은 더러운 것이 없지만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원래 더러운 법이니까……

모든 소란과 실망을 접어두고 침묵해야 한다. 대신 나는 눈을 들어 해와 달, 비와 이슬, 불과 바람과 열, 추위와 더위, 이슬과 소나기, 추위와 냉기, 얼음과 눈, 밤과 낮, 빛과 어두움, 번개와 구름, 땅과 산과 언덕들, 싹과 샘들, 바다와 강, 하늘과 새들, 짐승과 가축들, 사람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세 번째 하늘이라는 문맥과 배경에서 바라보기를 원하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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