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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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통계를 보면 뭔가 영웅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일에 감정적으로는 약간 초연한(detached) 경향이 있대요.” 열성과 고집이 있어야 큰 일을 해내지 않겠니? 하고 되물으려다가 말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매순간 감정적으로 몰입한다면 일을 끝내기도 전에 금방 나가떨어지지 않겠는가.

창밖에는 추적추적 늦가을 비가 내리고 있다. 지난 날 직장에서 겪었던 어려움들을 무겁게 떠올린다. 일 때문에 상사들과 부딪히며 부르르 떨던 기억들. 그 때문에 스스로 박차고 나오기도 했었고 때론 짤린 적도 있었다. 돌아보면 교만스러운 마음이 천착(attached)함으로써 빚어진 결과였다. 그러고 보면, 하는 일에 일희일비하며 쉽게 흥분하고 주위 사람과도 자주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이 큰 일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Detach’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한다는 것은 나에게 꿈 같은 일이다.

예전에 김건모는 ‘무릎팍 도사’에 나왔을 때 꿈이 무엇이냐는 도사의 질문에 ‘하늘을 날아보는 것’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평소 주위에 철 없는 모습을 보였던 터라 당시 그의 답은 유치하게 들렸고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었다 (아직도 그는 배트맨 마크가 그려진 옷을 즐겨 입는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점잖은 시인이 그렇게 답했더라면 아마도 그런 대접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I believe I can fly’라는 노래를 거리낌 없이 흥얼거리지 않는가.

사실 누구나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어릴 때는 정말 간절한 꿈이었다. 커서도 그 꿈은 다른 의미로 간절하다. 나의 세대에 익숙한 시 중에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있다. 봄에 그렇게 울던 소쩍새와 여름 먹구름 속에서 치던 천둥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국화는 어느 가을에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꽃을 피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꾸는 ‘비상’의 꿈이 아닐까? 이런 저런 번뇌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간절한 꿈일 것이다.

샤르트르 모든 사람은 신(god)이 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까뮈는 모든 사람의 인생 목표는 자신이 알든 모르든 성인(saint)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신이 없는데도 인간은 성인이 되려는 DNA를 지닌 채 이 세상에 내던져지듯 태어났으니,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실존적인 절망에 빠진다고 생각했다. 김건모의 비현실적인 꿈이 조롱거리라면, 우리 인간은 존재 자체가 조롱거리인 셈이다.

현실적이건 아니건 간에 사람에게는 ‘비상의 꿈’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 꿈은 가끔 ‘달관’ ‘관조’ ‘이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소쩍새와 먹구름 속 천둥의 울음을 ‘detached’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가능한 꿈이다. 무엇도 원망하지 않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서 주어진 일을 일희일비하지 않고 묵묵히 해 나간다면 성취할 수 있는 꿈이다.

보기 드물게 그런 꿈을 이룬 사람을 우리는 ‘성인(saint)’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마도 ‘인생은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하룻밤 묵어가는 불편한 숙소’라는 생각, 혹은 ‘지나가는 다리 위에 화려한 건물을 지어서 무엇 하겠느냐’는 생각이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소쩍새도 천둥도 결코 해치지 못한다. 그 어떤 비난과 억울함도, 심지어 육신에 가해지는 상해도 자신의 참존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나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하늘을 나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개와 고양이는 자신이 위협을 느낄 때 으르렁 거린다. 어쩌면 원망과 분노는 내 존재가 위협을 느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방어적인 반응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엇도 나를 해칠 수 없다는 확신만 있다면 풍파를 대해도 어느 정도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운전하다가 욕을 먹을 때 기분은 더럽지만 저녁이 되면 잊어버리는 것은, 그 욕이 그저 잠시 스치는 바람처럼 나를 해치지 못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사실 그 어떤 말도 그 자체로는 나에게 물리적인 해를 가하지 못한다. 다만 블루투스를 켜고있는 나에게 공간을 화살처럼 날아와서 내 안의 프라이드(pride=교만)를 치기 때문에 다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블루투스 기능을 꺼버린다든가 나의 프라이드를 스스로 포기한한다면 그 어떤 모욕과 비아냥과 조롱을 듣더라도 실바람처럼 지나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만이 불루투스를 끌 수 있고 성인만이 프라이드를 부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성인들은 심지어 자신에게 가해지는 물리적인 폭력마저 자신의 참존재를 해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태연하게 마셨을 때 그런 심정이었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내면에도 아마 이런 고급 스킬, 즉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도 초연해하는 능력이 있었지 않나 싶다. 그들처럼 되고싶다면, 참존재는 그 어떤 것에도 다치지 않는다는 이해와 믿음에 ‘어렵사리’ 도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확신이 없기 때문에 늘 다칠까봐 두려워한다. 프라이드가 없다면 보호하거나 지킬 것이 없고 다칠 일마저 없는데도 보이지도 않는 언어의 화살에 맞아 피흘리고 그래서 그때마다 복수를 다짐한다. 눈알이 빠지고 손목이 짤려도 내 참존재는 다치지 않는데도 손톱하나 뽑는 고문을 상상만 해도 두려워 사시나무처럼 떨고 만다. 제발 하늘을 날았으면. 무엇도 원망하지 않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실존주의자들은 애써 성인이 된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우울해 하였다. 개꿈 같은 것이랄까. 그러나, 늘 하늘을 나는 그런 꿈을 자꾸 꾸다보면 어쩌면 조금씩 이상한 방법으로 그 시인의 누님처럼 실제로 닮아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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