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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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진눈깨비가 내린다. 그런줄도 모르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려 나선 참이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나를 바라보는 강아지의 기대에 가득찬 눈망울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냥 비를 맞으며 동네 한바퀴에 나섰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지만 쌀쌀한듯 춥지않은 날씨이다. 밤새 집집마다 화려하게 혹은 소담스럽게 반짝이던 전등장식은 아침이 되자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고요한 밤을 지나 자신의 몫을 다한 전등은 스스로 아름다움을 겸손하게 감춘다.

학교에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막내와 농담을 주고 받다가 백미러에 비친 내 얼굴을 보게 되었다. 웃음기 있는 눈가에 부채살 모양의 주름이 지리산 골짜기들처럼 파였다. 빨치산들이 거기에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찾지 못할 정도로 어느새 깊어졌다. 육신이 차츰 스러져 가는 징조이다.

작년에는 무릎을 다쳐 한동안 고생했다. 좀 괜찮아지나 싶더니 올해에는 팔꿈치가 말썽이다. 테니스를 무리하게 요령없이 즐기다보니 생긴 증상들이다. 복잡한 세상사를 뒤로하고 공에만 집중하며 땀을 뻘뻘흘리면서 자주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었다. 몸에 무리가 가는 데도 그만 둘 수가 없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중독의 지경까지 이르렀던 모양이다. 몸 여기 저기에 나타나는 증상을 보아하니 이 격렬한 취미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것만 같아 아쉽기만 하다.

여가생활 중에서도 내가 가장 시간을 많이 들이고 있는 분야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테니스와 같은 취미활동이 주는 정도의 기쁨마저 거두지 못하고 있다. 난처한 일이다. 취미생활에는 뭔가 당장의 통쾌함이 있으나, 신앙생활의 효과는 느려터지고, 잦은 실망과 회의로 인해 시야가 잘 보이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도 희망을 가지고 질척한 인간관계들을 헤치며 뭔가에 쫓기듯이 그 보이지도 않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육신이 주는 통쾌함에 영혼은 그다지 만족하지 못히기 때문일까?

사람은 불멸하는 영혼과 스러지는 육신으로 결합되어있다고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비물질적인 실체(reality)를 단지 경험적인 관찰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부정하고 있지만, 물질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한다(contingent). 없는 것이 당연한데 왜 없지 않고 있는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반드시 존재해야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자기자신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존재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의 비물질적인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존재 중에 특히 사람은 그 구성이 참으로 희한하다. 비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은 천사와 동물이 결합한 것도 아니고, 유령이 사는 집도 아니다. 그처럼 서로 불편하고 이질적인 동거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영혼과 몸이 단짝처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몸의 본성이 영혼의 본성보다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몸의 본성은 노력하지 않아도 발휘되는 반면에 영혼은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빛을 발한다. 우리 몸은 동물적인 기쁨을 누리는데에 너무 익숙하고 온통 거기에 집착하는 반면에 영혼의 기능은 어렵사리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그 노력에 비해 단시간에 보상을 받지도 못한다. 거기에다 영혼은 몸의 기쁨을 즐길 수 있지만, 몸은 영혼의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이래저래 영혼의 기쁨보다는 몸의 기쁨을 추구하는 데에 늘 기울어져 있다. 특히, 현대와 같이 이성에 지쳐버린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테니스가 주는 기쁨에 이렇듯 빠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쉽고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실은, 몸이 욕구를 가지고 있듯이 영혼도 독특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몸이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고 있듯이 영혼도 자신의 기쁨을 추구한다. 영혼이 느끼는 굶주림과 배고픔은 몸이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생하고 그래서 똑같이 고통스럽다.

이 두가지 종류의 욕구가 사람 안에서 갈등을 일으켜 혼돈 상태에 빠질 때가 많다. 마치 두 인격이 사람 안에서 다투고 있는 것만 같다. 동물적 본능은 영혼을 불살라버리고 영혼은 그로 인해 괴로움에 싸인다. 두 본성이 대치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은 잠재적으로 늘 깊은 혼돈 상태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혼이 어떤 상황인지 알수 없고 따라서 그 사람을 심판할 수도 없다. 나 자신의 영혼도 혼돈 상태인데 어떻게 남의 영혼을 심판하겠는가?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뜻으로 새길 일은 아닐 것이다. 단지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뜻일 뿐이다. 이는 사람이 자신이 지닌 이성을 잘못 사용할 수도, 그래서 비합리적일 수도,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일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람만큼 납득할 수 없는 존재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군자나 학자에게서 추악한 위선을 발견하기도 하고, 매국노나 창녀에게서도 거룩한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사람은 스스로 충분하지 않은 존재, 결함이 있는 존재이다. 우리의 지성과 의지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사 지성과 의지가 완벽하다해도 이 결함은 해결되지 않는다. 우주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사람 역시 자기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불충분할 수 밖에 없는, contingent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새 날이 밝아오면 전등은 자신의 화려한 빛을 감춘다. 내 육신의 스러지고 있는 것을 보니 어쩌면 운명의 새벽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육신이 쇠하더라도 그 깊은 골짜기에 작은 냇물 하나 소리없이 흐르고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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