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의식의 흐름

427

아침 산책을 나섰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에 사용되었던 어린 전나무들이 동네 곳곳에 버려져 있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용도폐기되어 이제 쓰레기 차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말라가고 있다. 어릴 적, 겨울에 땔감을 마련하려고 뒷산에서 나무를 베고 지게로 나르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아버지에게서 배운대로, 산림을 해치지 않으려고 왠만하면 시원찮은 나무를 찾아 베었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빽빽한 나무들 가운데에서 하나 골랐었다. 저리 어린 나무를 베어다가 잠시 장식으로 사용하고서는 그냥 내버리다니 몹쓸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무가 많고 자연환경에 세심한 나라이니 이 정도는 괜찮다 싶었을 수도 있다. 나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설마 산에서 베어오지는 않았겠지.

날씨는 다시 쌀쌀해지고 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영상과 영하를 오르내린다. 연말을 지나 1월 중순이 되어가지만 집 앞 잔디가 여전히 파릇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는 눈이 잔뜩 내려 다시 잔디를 하얗게 덮었다. 점심 때 둘째아이를 라이드해야 한다는 생각에 차를 잠시 차고에 넣었다. 차고 문 여기 저기 상처난 흔적이 눈에 띈다. 이 문은 나에게 두 번이나 봉변을 당하고 흉측하게 찌그러졌었지만 착하게도 아직 리모콘으로 잘 작동되었다. 차고 문 앞에서 두번이나 자동차 기어를 파킹하지 않고 내리는 바람에 차가 문을 들이받아서 생겼던 참사였다. 문을 어거지로 펴고나니 그럭저럭 다시 쓸만해졌다. 평소에도 부주의한 운전습관 때문에 아내에게서 지적을 받아온 터라 호랑이같은 불호령을 예상했었지만 용케도 아내는 두번 모두 너그럽게 지나가 주었다. 아내는 어느덧 세상을 관조하게 된 것일까? 한국에서와 달리 변변한 직장도 없어 쉽게 주눅 들만한 처지에서 아내의 관대함은 더욱 감사할 일이었다. 아침에 본 그 전나무처럼 쉽게 집에서 내동댕이 쳐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창문 너머로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이웃집 Bill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운동가방을 든 것을 보니 아침부터 YMCA에 다녀온 모양이다. 한번은 저 할아버지를 토요일 아침 일찍 YMCA Gym 안에서 본 적이 있다. 길에서 마주치면 서로 겸연쩍게라도 인사를 주고 받는 사이였지만 그 안에서는 못본체 하였다. 그 할아버지도 어색했을 것이다. 8년이 지났는데도 여기서는 이웃집과 잘 친해지지 않는다.

늦은 나이지만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최근에 지인의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무리 백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신경을 써서 건강관리를 해야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차를 태워주신 그분은 새해부터 금연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앞으로 억지로라도 물을 자주 마시는 습관을 기르기로 했다. 하루에 팀호튼 미디엄 커피를 세잔이나 들이붓고 평소 물은 잘 마시지 않아서 그런지 각종 물부족 증상에 시달리고 있던 차였다.

얼마 전에 ‘인간극장’에서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김형석 (전)교수가 떠오른다. 백세의 나이로 여전히 강연과 저술을 하며 건강하고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저런 처지의 나이가 되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며칠 전 성당 친교실에서 어떤 분으로부터 그분의 남편이 나중에 혼자가 되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득,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전에 되도록이면 아내와많은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아내는 지금 여행 계획에 몰두해있다. 살면서 몇번의 경제적 위기를 경험한 뒤부터 이제 아내는 여행을 위해 빚을 내는 것조차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잠깐의 ‘눈요기’를 위해 그 정도의 자금을 써버릴 것이면 차라리 그 돈으로 집 마루를 모두 나무로 깔고 변기도 바꾸는 등 집 수리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으로 아내의 통큰 그림을 극구 반대했다. 결국 무엇이 더 가치있게 남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변변히 해준 것이 없음을 늘 마음으로 불편해하던 차에 때를 놓치기 전에 좋은 추억을 함께하고 싶어했고, 나는 ‘굳이 그렇게까지 통크게?’라는 심정이었다. 용기의 덕과 절제의 덕이 부딪치고, 추억의 가치와 경제의 가치가 갈등하다가 결국은 단호하고 절실해 보이는 아내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내가 이기게 된다면 나중에 혹시라도 혼자 오래 남았을 때 죽는 날까지 내가 이긴 것을 통회하며 지낼 것 같아서였다. 아내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굶어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이미 용감한 사람이다. 나만 더 용감해지면 될 것 같다.

한국 나이로 따져보니 오십대에 접어들었다. 길게만 느껴졌던 사십대와는 달리 앞으로는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갈 것 같다. 아마 부부가 죽음으로 헤어질 날도 그만큼 성큼 다가올 것이다. 여기서는 이웃집 할아버지와도 잘 친해지지 않지만, 같은 또래 중에서도 마음 깊은 친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사랑은 존재의 무게’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무거운 것이 만유인력때문에 땅으로 향하듯, 존재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향해 이끌려간다. 그것이 땅이면 땅으로, 그것이 하늘이면 하늘로. 손이 무모하게 크지만, 같은 곳을 향해 끌려가고 있는, 친구같은 아내가 오늘은 좀 귀하게 보인다.

제법 눈이 많이 싸였다. 지난 반세기의 기억도 저 눈처럼 덮여가고 있다. 지난 허물들도 기억과 함께 같이 덮여버렸으면 좋으련만. 만약 기억에 묻혔던 내 잘못과 허물의 파장을 낱낱히 생생하게 다시 대면하게 되는 세상이 진실로 오게 된다면, 그 때는 이미 용서받았다는 선언만으로는 행복에 이르지 못할 것 같다. 아직 속죄의 고통을 받을 길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그 때에는 아마도 큰 위로와 축복이지 않을까. 나는 ‘연옥’이라는 곳이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벌써 12시다. 이제 둘째아이를 태우러 간다.

NO COMMEN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