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운 날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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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기온이 영하 20도, 오랜만에 몹시 추운 날씨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일은 아예 포기하고 말았다. 몇 년 동안이나 쭉 내 몫이 되어버린 일과였지만 이런 날은 좀 꾀를 부려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무릎 위에서 내 눈과 현관문을 번갈아 쳐다보며 낑낑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채비를 하고 밖을 나섰다. 그러나 길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강아지는 발바닥이 시려운지 이쪽 저쪽을 바꿔가며 자꾸 절뚝거린다. 발은 시리고, 바람 냄새는 맡고 싶고…… 그 마음에서 소용돌이치는 작은 번민이 상상이 된다. 그래도 이 놈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않고 미련스럽게도 가던 길을 계속 앞장서 간다. 평소에는 눈덮인 남의 집 잔디 위로 뭔가를 찾아 여기 저기 끊임없이 킁킁대더니 오늘은 고개를 숙인 채 절뚝거리며 묵묵히 걸어간다. 애처로운 마음에 그냥 다시 발을 돌리고 말았다.

이런 날은 사방에 바람을 막아주는 벽이 있고 위에는 눈을 막아주는 지붕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다. 텐트와 달리 전기와 난방도 누릴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이제 아이를 학교에 태워주려고 다시 나섰다. 학교 지붕 위 작은 굴뚝에서는 유난히 하얗고 두꺼운 김이 마치 공장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굴뚝 윗머리 부부에는 막 퍼지기 시작한 아침햇살이 한줌 소박하게 걸려있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햇볕의 흔적을 보고도 이렇게 추운 느낌을 받다니 이상했다. 오늘 아침은 유난히 라이드를 하는 차량이 많아서 길이 밀린다. 평소에는 걸어오던 아이들도 오늘은 부모들이 라이드를 해주는 모양이다. 학교를 빠져나오는 골목에 서있는 전봇대 꼭대기에도 햇볕이 물들었다. 서리로 하얗게 질려있는 나무 전봇대들은 유난히 창백하고 으스스하다. 어떤 집 앞에서는 수도관이 터졌는지 물이 새어나와 골목에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이내 얼어붙어 길은 물반 얼음반으로 질척거렸다. 한동안 해이해져 있던 겨울이 갑작스런 추위를 얻어맞고 분주한 모습이다. 집으로 오는 길에 따듯한 커피를 사들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따스한 감촉이 몹시 고마운 아침이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뿜는 날숨도, 차들이 뿝어내는 연기도 모두 담배연기처럼 새하얗다. 가녀린 김들이 구름 모양으로 차가운 대기 속에 퍼진다. 숨과 구름과 불이 모두 ‘생명’을 상징한다는데 우연은 아닌듯하다. 이렇게 추운 아침에야 비로소 그 느낌을 알겠다. ‘숨’은 생명이다. 숨이 붙어있으면 생명이 붙어있는 것이다. 추울수록 그 숨은 내뿜을 때 구름처럼 하얗게 변한다. 그래서 구름은 대기 중에 있는 생명의 스피릿을 상징하기도 한다. 추운 들판에 핀 모닥불처럼 불의 온기는 야생의 거친 생명을 지켜준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초월적인 스피릿을 느겼던 오래전 사람은 그것을 구름이나 불로 표현했겠구나, 그 표현이 적절하구나.

집에 들어오니 따듯한 온기가 전해진다. 들판을 헤매던 야생동물이었던양 이 온기가 반갑기만 하다. 내가 자랐던 시골 집에 비하면 격하게 향상된 환경이다. 어릴 적 시골 동네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너도나도 기름보일러를 설치했다. 그러나 집 자체가 단열이 잘 되어있지 않고 외풍도 심해서 그런지 한달 난방비가 시골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에는 쓰라렸다. 보일러는 거의 꺼져 있었다. 간혹 손님이 올 때나 명절이 되어서야 켜고 잠시 데우는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 동네 어른들는 벌벌 떨며 겨울을 나곤 했다. 한 세대를 거쳐 이렇게 비교적 무난하게 난방이 되는 따듯한 집에서 지내다니 나는 운이 좋은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부모님들의 삶이 애잔하다.

추운 겨울에 집(하우스)이 차가운 눈과 바람을 막고 실내를 따듯하게 하듯이, 가정은 차갑고 거친 바다같은 바깥 세상에서 돌아와 쉴만한 공간이 된다. 그러나 어릴 때 그 시골집처럼 모든 집이 늘 그렇게 난방이 잘 되는 것은 아니듯이, 모든 가정이 온기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그마한 따듯함은 금방 차가운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기 마련이다. 강추위에도 집에 온기를 계속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난방비가 필요하듯이, 가정에도 온기를 유지하려면 자기 살을 떼어내는 듯한 ‘유지비’가 들게 된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만을 누리려다가는 어느 순간 부터 가정생활은 꼬이게 마련이다.

가정의 가장 큰 축은 부부의 결혼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결혼을 기쁨과 감동의 관점으로만 접근하다보면 결혼의 형태가 뒤틀리기도 한다. 2006년 영국의 어떤 중년의 여인은 15년 동안 알게된 돌고래와 이스라엘의 한 리조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수백 명의 하객이 참석했다. 돈많은 사람이 재미로 벌인 이벤트였을까? 그러나 여인은 “신디(돌고래 이름)를 만나면 정신적인 평화와 안정을 느꼈다”면서 “진심으로 ‘돌고래 신랑’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스개 같은 해외토픽으로만 넘겨버릴 수가 없는 것이, 이런 시각은 우리 시대의 결혼에 대한 대표적인 관점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정신적인 평화와 감동을 주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그 사람이 우연히 나와 동성일 때 그와 결혼하는 것이 왜 나쁜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결혼에는 개인적인 기쁨과 감동의 가치를 넘어서는 더 큰 가치, 즉 존재의 거룩함이 생명처럼 살아 숨쉬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결혼은 단순한 사회제도가 아니라 이 우주의 생성원리인 사랑과 생명을 눈에 보이게 담아내는 작은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과 그것을 의미있게 살아내는 것은 다른 문제이듯이, 결혼에 거룩한 의미가 있다는 것과 내가 그 속에서 사랑과 행복을 일구어 낸다는 것 역시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차가운 현실의 들판에서 한 줌 온기를 발견하기가 왜 이리 어려운 것일까?

이 겨울 우리 가정은 실내 온도만 따듯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의 기운도 녹아 박동하기를 기대해본다. 인간의 생명이 그러하듯 그냥 선물 받은 것이니, 우리 가정에 숨쉴 따뜻한 생명도 구름처럼 우리 가운데 선물처럼 내려와 꺼지지 않는 불로 늘 살아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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