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라는 문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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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하늘에 구스 몇마리가 낮게 날아간다. 어릴 적 고향에서도 앞마당 평상 위에 누워 파랗고 깊게 펼쳐진 아침 하늘 속으로 기러기들이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곤 했었다. 새들의 힘찬 날개짓을 보고 있노라면 투명한 허공에는 두 날개를 받쳐주는 ‘공기’라는 물질이 가득 차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새들에게 공기와 바람은 물고기들에게 바다나 그 조류와 같다. 그들에게 공기와 바다는 태아를 둘러싼 양수처럼 현실적이고 필수적이다. 사람 역시 텅 빈 진공 속에서 외롭게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나의 무심함을 저 새들은 일깨워준다. 세계는 뭔가로 가득하다. 빈틈없이.

눈에 보이는 자연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허전하고 불편했는지, 인류의 조상들은 보이지 않는 신이나 정령들이 자연을 초월하여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인은 그 많은 올림푸스의 신들을 상상하고, 우리 조상들도 도깨비나 서낭당 신, 삼신할미 같은 크고 작은 신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본능은 진공 속의 자연을 불편해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도 있지만, 내 존재의 테두리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가정하는 것이 겸손한 태도일 것이다.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바다’ 속에서 조류를 타고 헤엄치거나 그 파도 위에서 서핑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운명론자가 될 필요는 없다. 바람을 잘 타서 눈부시게 날아가거나, 조류를 잘 헤아리는 법을 익혀서 그 속에서 나름 자유롭게 헤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는 취약한 상상력만 극복한다면 인식의 지평이 놀랍게 넓어질 것이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높이 날려면 눈 앞의 텅 비어있는 공간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내 날개를 충분히 지탱해줄 만큼 튼튼한(?) 공기가 가득 차있다는 것을 먼저 믿어야 할 것이다.

보이는 것만 맥락 없이 덩그렇게 던져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를들어, 책을 읽을 때도 문장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행간의 의미’가 살아있다. 일상 언어에서도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문맥(context)’을 알아야 한다. ‘나는 당신의 지갑을 훔치지 않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 같지만 곰곰히 생각할수록 아리송해진다. 나는 훔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훔쳤다는 말인지, 당신의 지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갑을 훔쳤다는 것인지, 지갑이 아니라 시계를 훔쳤다는 것인지, 훔치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 있는 돈을 꺼냈다는 뜻인지… 도무지 헷갈린다. 텍스트가 ‘뼈’라면 문맥(context)는 ‘살’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뼈를 살아있게 이해하려면 그 살의 온기와 함께 느껴야 하는 것이다.

내 존재도 이유 없이 세상에 외롭게 던져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 피와 살, 인성과 DNA를 가깝게는 부모라는 문맥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특히 ‘어머니’라는 문맥을 빼고는 내 존재를 설명하기가 힘들어 질 때가 많다. 내가 국수라면 어머니는 그 국수를 감싸고 있는 국물과도 같다. 아무도 어머니를, 나를 존재하게 하기 위한 한낱 도구, 수단, 시험관 정도로 여기지 않는다. 그분과 나와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친밀한 10개월이 있었고 그것은 그 후로도 내 존재의 작은 문맥을 이루고 있다.

학창시절, 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떠나는 고속버스에 앉을 때면 창 밖으로 나를 향해 힘없이 손 흔들며 눈물 흘리는 어머니를 보곤 했다. 군대 가던 날에도 기차의 창문 너머로 남겨진 기차역에서 슬픈 표정으로 서있던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친구들에게 소식을 알렸었다. 열일 제쳐놓고 천리길을 내려온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은 그 후로도 평생 애틋하다. 어머니와의 그 신비한 유대감은 탯줄을 떠나서도 자녀의 삶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영웅과 성인들이 등장했었다. 그러나 만약 그 중에 누가 불효자였다면, 그사람이 남긴 공적이 얼마나 크건, 그가 바라본 세계가 얼마나 깊건, 그 빛나던 탑은 단 한방울의 혐오감으로 인해 바벨탑처럼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아들을 알려면 그 어머니를 보고 그 어머니를 알려면 그 아들을 보라’는 서양 속담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나 안중근의 어머니 조여사나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존경하게 된다.

만약 가장 완전하고 고결한 본성의 소유자,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 존재의 이데아’와 같은 그런 사람이 실재로 있다면 그는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 존재를 위한 징검다리나 도구라고 여겼다면 그 사람 자체가 모순덩어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어머니를 향한 나의 마음에는 흠이 많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 사람의 사랑은 완전하고 고결할 것이다. 또한, 아들이 위대할수록 그 어머니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거룩함이 있기 마련이다. 진주는 가끔 돼지우리에서도 발견될 수 있지만 위대한 아들은 결코 위대한 어머니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이데아’의 어머니는 인류 진화의 마지막 최정점에 다다른 존재, 진화의 새 국면을 맞이하여 새로운 종족과 유일한 연결고리나 접점이 되는 ‘중개자적인’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어머니는 자식의 영웅적인 숙명이 내포하는 고통을 가장 먼저 알아본다. 그래서 위대한 어머니의 삶은 늘 신산하다. 그러나, 인류에게 빛과도 같은 그런 인물에 감사하듯이, 그를 전해준 그 모태에도 우리는 박수를 보내게 된다. 만약 그와 내가 열일 제쳐놓고 천리길을 달려가는 친구 관계일수록 더욱 그렇다. 어머니는 새들에게 공기나 물고기들에게 바다와 같다. 그런 존재로서 내 친구에게 훌륭한 유전자와 사랑과 보호를 베풀어주고, 그의 삶에 겸손한 배경이 되어 준 어머니를 나는 마치 기차역에 서 있던 내 어머니인양 흠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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