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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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학교를 갔다 왔을 때 도시락 통을 꺼내놓지 않아서 아침마다 도시락을 준비하고 나면 꼭 책가방을 뒤지게 된다. 비닐 팩으로 된 우유를 다 마시면 새 우유 팩을 통에 꽂아서 냉장고에 넣어주면 좋으련만 늘 빈 통이 밖에 놓여있다. 사용하고 난 오븐 주위에는 식용유가 질척거리고 프라이팬에는 굳은 기름이 그대로 남아있다. 자기가 먹은 것을 설거지 해주기까지 바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름도 닦아내지 않고 식기를 싱크에 던져놓거나, 심지어 물통이나 과자봉지마저 굳은 돼지기름으로 지저분한 싱크에 같이 놓여있다. 소파 주위에는 과자 부스러기들이, 방 바닥에는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학교도 그 정도 거리면 이제 좀 걸어다녔으면 좋으련만 아직까지도 라이드를 원한다. 친구들과 영화관이나 식당에 오고 갈 때 버스를 타면 좋을텐데 자기는 물론 친구들까지 라이드 해주기를 바란다. 헤드폰을 끼고 컴퓨터 오락하느라 아빠가 무거운 물건을 옮기며 낑낑대고 있는 줄도 모른다.

타일러서 되는 일도 있고 소용없는 일도 있다. 아내 말대로 아이들과 지혜롭게 소통하는 법을 익혀서 자연스럽게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그냥 내가 하고 말지’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이래저래 마음 속에 ‘생활 스트레스’가 쌓여만 간다. TV에 나오는 부모들은 어찌 그리 사랑이 많고 헌신적일까?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을망정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한다. 다만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한 생각이 저마다 다를 뿐이다.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있는 한, 온갖 종류의 스트레스를 면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한데 그것들을 안고서도 과연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떤 이가 말하기를, 행복을 좌우하는 데에는 세가지 원천이 있다고 한다. 첫째가 타고난 기질과 여섯 살까지의 성장환경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행복에 50 퍼센트나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행복은 유전된다’라는 말도 지나친 말은 아닌 것 같다. 둘째로 중요한 원천은 내면적인 덕성이다. 이는 사람의 행복에 40퍼센트의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덕’이라는 말은 ‘스킬’ 같은 것이어서 올바른 지도 아래 세월을 두고 경험과 수련을 거쳐야 습득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변화무쌍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지혜로운 관점을 가지게 된다.

세번째의 원천은 나머지 10%로서, 경제적이거나 건강적인 것 등 환경적인 요소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부분을 추구하지만 사실 행복을 구성하는 데에 금전은 놀랍게도 그다지 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은 사람의 두뇌구조 때문인데, 외부로부터 받은 자극은 3개월에서 6개월이 지나면 너무 익숙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아무리 냄새나는 화장실이라도 5분만 앉아있으면 냄새를 느끼지 못하듯이, 아무리 좋은 집, 좋은 차, 넉넉한 통장을 가지게 되더라도 그 즐거움은 6개월 정도 지나면 익숙해져 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얻고자 애쓴 세월에 비해 허망하고, 잃을까 전전긍긍할 앞으로의 시간을 감안하면 화근이기까지 하다. ‘건강’도 마찬가지이다. 잃었을 때 불행해지고, 회복했을 때는 행복해지지만, 평소 건강한 생활에 익숙한 상태이면 그 자체 때문에 행복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공기는 너무도 소중하지만 공기 때문에 행복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장기간 병원 신세를 지는 사람들, 혹은 노숙자 생활을 하는 사람들, 혹은 후진국 사람들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행하지만은 않은 것이, 나름 그 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기쁨이든 고통이든 모든 것이 익숙해져버리고 난 다음에는 내가 유전자로 물려 받고 6살까지 성장환경으로 형성된 첫번째 행복의 수준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천성이 낙관적인 사람은 낙관적으로, 비관적인 사람은 비관적으로. 아무래도 나는 간장종지 만한 행복의 능력 밖에는 물려받지 못한 것 같다.

한편, 행복을 위한 내면적인 덕성에는 ‘믿음’이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다. 첫째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어떤 사람이 책상에 졸고 있을 때, ‘그래, 만약 저 친구에게 졸지 않을 능력만 있었더라면 분명히 경청하고 있었겠지. 저 친구는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라고 생각해주는 믿음이다. 이런 식의 믿음을 훈련한 사람은 타인에게 자비로워지고 웬만해서는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둘째는 영성적인 믿음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내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서로 협력하여 결국에는 선(good)을 이룬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지금 스트레스와 고통과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조차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결국은 나 혹은 그 누군가를 위해 좋은 일이 일어나기 위한 필수적인 디딤돌이라고 믿는다. 소나기 내리는 먹구름 위에는 해가 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해바라기는 늘 해를 바라봄으로써 스스로 해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내게 일어나는 작은 고통들 속에는 미래에 꽃피게 될 희망의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믿는 훈련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에는 내 마음도 현실도 그 희망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시련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좋은 것도 얻을 수 없다면 시련은 오히려 황금을 잉태하는 자궁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고난으로 가득 찬 삶 자체가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의 커다란 모태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졸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서 최선을 믿어주고, 주위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어떤 의미가 있을 것임을 믿어준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이다. 모든 것이 모여 선(good)을 이룬다는 말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현재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단지 ‘선’이 아니라 ‘최선(best)’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남을 탓하거나 주어진 여건을 원망하는 대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그리고 내가 평소 한심하게 생각해온 사람들도 어쩌면 그러지 않을 능력만 있었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그들도 나름 최선의 삶을 살고 있음을 믿어야겠다. 어찌 알겠는가, 그러다 보면 진정 헌신적인 아빠가 되고, 싫은 사람마저 사랑스러워 보이는, 간장종지가 바께스로 바뀌는 그런 날이 실제로 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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