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YMCA 남자 탈의실에서는 어떤 노인이 팬티만 입은 채 하모니카를 불며 민망하게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데 오늘도 역시 귀에 익숙한 추억의 가곡 여럿을 제법 훌륭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사람이 탈의실로 들어올 때마다 “You missed the old collections!” 하면서 능청을 떤다. 그와 눈마주침이 어색한 나는 구석에서 조용한 관객이 된다. 봄이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오는 것 같았다.
노인의 연주가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허망할까? 거리에서 버스킹하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무런 대꾸가 없어도 그냥 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마운 일일 것이다. 무심하게 지나치더라도 거리에 사람이 있으면 그저 다행이다. 휑한 곳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낫다. 만약 사람들이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면 큰 행운이다. 나아가, 그 연주를 진정으로 이해까지 해준다면 관객은 이제 그 연주의 일부로서 깊이 참여하게 된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종종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다. 이 때 친구가 나에게 물리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저 내 손을 꼭 잡아 주기만 해도 큰 위로를 받기도 한다. 친구가 설사 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홀로 어려움을 대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친구가 내 처지를 이해까지 해준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도 없을 것이다. 중년을 지나는 나는 이제 배우가 되기 보다는 좋은 관객이 되고자 애쓴다.
연극의 3대 요소는 희곡, 배우, 관객이라고 한다. 우리는 자주 배우에게 열광하지만 ‘관객’의 비중을 간과하는 일이 많다. 목소리가 적거나 조명을 덜 받는 쪽은 늘 소외를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우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관객 역할을 제대로만 한다면 어떤 의미로든 연극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그 무대를 이해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사실 나는 좋은 관객이라기 보다는 무심한 방관자요 이방인일 뿐이다.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은 감정적으로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어머니가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햇빛이 눈에 부시다는 이유로 방아쇠를 당긴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그도 죽는다.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못할 정도로 세상에 무관심한 이방인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까뮈는 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으로 살려면 그저 살아 숨쉬는 것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실존주의자들은 우리의 삶을 ‘생존’과 ‘실존’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생존은 그냥 살아 숨쉬는 것이다. 인간은 그냥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실존주의자들의 생각이다.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면서 살아야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뭔가 주어진 체제를 아무 생각 없이 맹종하는 것, 나에게 주어지는 어떤 윤리적인 가르침을 이해도 없이 무작정 따르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중 속에서 벗어나 홀로 진실을 대면하고 그에 따라 자유로운 결단을 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이라는 책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바치기 전에 하느님과 일대일 관계에서 느끼는 공포와 전율을 이야기 한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는 행위는 결코 윤리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었고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자신도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일대일로 대면한 하느님이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조용히 바람처럼 속삭인 것을 아브라함은 알아차리고는, 온전히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로 내린 결단이었다. 이것을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비슷한 이야기도 전해온다. 어떤 임금이 적과 싸우러 가기 전에 ‘하느님 이 전투에서 이기게만 해주시면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나를 환영한 사람을 바치겠습니다.’ 맹세한다. 결국 자기가 사랑하는 딸이 가정 먼저 북을 치며 뛰쳐나와 환영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딸을 바친다. 삼국지에서는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었던 제갈공명의 이야기도 있다. 브루투스는 친구 시저를 죽이고 정권을 잡고나서 강하게 법질서를 세워나가던 어느날 자신의 아들 둘이 범법행위를 한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울면서 아들 둘을 처형했다. 이런 경우들은 모두 맹세의 가치라든가 대의를 지키는 면에서 윤리적으로 허용될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당시 주위 사람들도 그 지도자들을 모두 칭송하였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스스로 맹세한 적도, 사람들과 합의한 대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 자신도 이사악을 바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리고 바치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이유를 여럿 주장할 수 있었지만, 깊은 내면에서는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아들을 바치는 순간에 하느님을 홀로 대면하고서는, 비록 어떻게든 아들을 다시 돌려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지만, 그는 공포와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고독한 결단을 내리고 있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적 행동’이라고 부른다.
좋은 관객이 된다는 것은 그냥 숨만 쉬는 관객이 아니라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하고 스스로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참여하는 ‘실존적’ 관객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주일이면 기계적으로 교회에 가고, 신부나 목사의 말을 법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설사 성경에 있는 이야기라도 이를 생각해보지도 않고 맹신하고, 그러다 보면 천국 간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있더라도 그냥 이방인이다. 내가, 성체는 소중하다고 하니까 그 앞에서 기계적으로 절하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야 한다고 하니까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고, 감실 앞에서는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뭐라고 하니까 예를 표한다면 또한 나는 이방인이다. 나만의 온전한 자유로써 이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받아들이고 이 성체를 통해 내가 그리스도와 연결이 될 것임을, 내가 사랑하는 분이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성사를 세워 주셨다는 것을 알고 그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체를 내 안에 모시는 것, 키에르케고르의 이야기를 빌자면 이것이 ‘실존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중요한 무대라도 끊임없이 재방송을 보는 것 같다면 타성에 젖기 마련이다. 어찌해야 반복되는 일상을 늘 살아있는 현장으로 이해하고 실존적인 관객으로 참여할 수 있을지, 어찌하면 저 배꼽 아래 깊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대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러지 못할 때 나는 눈 앞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무대에서 그저 이방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 내게 봄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절박함이 있다.